침묵의 세계
새벽의 어스름녘. 보라색 빛깔의 공기와 안개를 가르며 날아가는 청설모처럼 내가 부딪히는 이 시간도 정처없이 부유한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과 시공간에 대한 아포리즘, <침묵의 세계>를 읽었다. 보다 더 과묵해졌다. 펄펄 뛰던 스물한살, 스물두살 시절이 점점 희미해져서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상황 대기가 끝나고 1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되면 나는 혼자서 어두운 아스팔트길을 따라 식당으로 향한다. 그 짧은 길을 지나 저 철망 너머에 서있는 낮은 산등성이를 따라서 주황빛 석양이 진다. 태양이 떠있는 동안 저 산 위에 부유하던 구름들은 땅위로 낮게 깔리고, 시들어가는 내 두 뺨 위로 흘러온다.
시간 속을 부유하는 것 같은 이 느낌. 결코 잊을 수 없어서, 잊고 싶지 않아서 어둠 속을 달려간다. 뛰면 안되는데, 뛰면! 하지만 상관없어. 아무도 볼 수 없다. 내 코끝 앞까지 다가와 두 눈을 부릎뜨지 않는한은.
자유다. 너무도 짧은 이 시간, 숨막힐 듯이 폐쇄공포증에 질려있는 내 자유!
어찌 위로해야할지.
이 시대의 진정한 멋쟁이라면 저 철망 따위 아랑곳 않고 저 멀리 뛰어갔을 것이다. 저 남쪽 바다, 허술한 배들이 한데 모여있는 목포앞바다까지 말이다. 그리고 마카오행 밀입국선을 타고, 썩은 지폐 냄새를 맡다가 파리를 향해 머나먼 길을 떠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