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을 배회하기

토요일 저녁 종각에서 고려대 동기 친구 MN을 만났다. 씩씩한 모습이 변치 않았다. 얼마후면 공장에 취직할거라고 했다.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또 우리는, 누구보다 그걸 잘 찾을 수 있었는데 나는 얌체처럼 떠나버렸고 MN은 이제 어엿한 사회운동으로의 진출을 예비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나는 딸기쉐이크를 혼자 먹고, 롯데리아에서 아주 잠깐 이야기를 하고, 곧 헤어졌다.
마음 속에 차오르는 공허함 견딜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서점으로 향했다. 반디앤루니스 종각점. 그곳에서 서가 사이사이를 멍청이처럼 배회했다. 나는 아주 자주, 너무나 자주, 이렇게 도심의 대형서점을 배회한다. 딱히 할일이 없으면 꼭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중학교 때부터 주욱 그랬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거리고, 훑어보고, 제목들을 살피고, 읽고, 책을 찾는 사람들 표정을 보고,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본다.
중학생때는 역사 코너와 중국 고전문학 서적이 꽂혀있는 서가 사이에서만 배회했다. 가끔 책을 몇 권 사기도 했는데 지금은 다 어디에 꽂혀있는지 모르겠다. 그땐 삼국지를 너무 좋아해서 이문열 삼국지를 열한번씩이나 읽었다. 꼭 그럴 필욘 없었는데 그게 나에게는 어쩌면 일정한 판타지였던 것 같다. 난세에 등장하는 제각기 개성있는 온갖 캐릭터들이 자신들만의 '정의'를 위해 일어서고, 싸우고, 배신하고, 충성하고, 죽이고, 죽는다. 마지막 순간의 그 비극성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번에 읽을땐 관우가, 강유가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또 제갈량은 토벌에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아무 의심없이 다시 기대하고 그 세계 안에 빠져들어갔다.
고등학생때는 사회과학코너에서'만' 배회했다. 그 당시 유명세를 누리던 강준만과 홍세화의 책들을 뒤적였던 것 같다. 또 그 즈음 등장한 진중권이니 김규항 같은 이들이 펴내는 무크지 <아웃사이더>도 읽었던 것 같다. 그때 엄마는, 내 친구들의 어머니들과 달리 내가 책을 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약간 밉기도 했지만 그래서 왠만하면 참으려고 노력했다. 아마 그때 책을 마구마구 사댔으면 지금 내가 책들에 끌리는 이 집착은 훨씬 더 통제불능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예 인문학 코너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너무 감상에 빠져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참, 격렬한 10대 소년이었구나. 아무튼 그랬다. 고전문학은 지루하고 따분하다고만 생각했으니.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내 사회과학 에세이들의 서정성과 감정들에 매력을 느꼈던 게 아닐까 싶다. 열여덞살때 <B급좌파>라는 책을 봤는데 김규항 특유의 풍자적이고도 단호하며 반성적인 문체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 당시 그걸 읽고 매료되었다는 다른 여느 대학생들처럼 말이다.
대학생때도 이따금 대형서점을 배회했다. 그때에는 어디로 갈지 몰라 계속 방황만 했던 것 같다. 꽤 자주 영화서적 코너에 가곤했는데 거기 꽂혀있는 책들을 보며 왠지 내가 모르는 영화의 세계가 저렇게도 넓고 깊게 퍼져있는 것 같아 시셈이 났다. 하지만 대학생때 내 독서는 거의 목적론적인 것에 치우쳐져있었다. 학교 안에서 마주치는 다른 그룹 활동가들과의 논쟁에서 이겨야만 한다고 느껴서 굉장히 전투적으로만 책을 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대학시절에 만난 알튀세르가 내겐 확실히 강력한 에너지원으로 남았다. 스탈린주의적으로 경도된 프랑스 공산당이라는 진흙탕에 끝까지 남아있고자 하는 태도, 그리고 끝내 비극적으로 면소 처분 받은 자로 추락하면서 삶의 비극적 면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죽음까지. 그가 드러낸 철학이 그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받아들인건 오직 그런 진정성, 삶에 대한 자세,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동류의식 같은 것이었다. 특히 스물넷 즈음에는 더더욱 그랬다.
스물네살때부터 나는 인문학 책만 읽는다. 대학시절에는 알튀세르만 제외하고는 거의 정치경제학, 맑스주의 같은 사회과학책만 읽었는데, 그 후로 3년 넘는 시간동안은 거의 인문학 텍스트만 읽었다. 특히 군대에서 읽은 200여권의 책이 앞으로 내 삶에 많은 자양분이 되리라고 믿는다. 도스토예프스키, 알베르 카뮈, 앙드레 말로, 사르트르, 카프카의 전집들. 또 슬라보예 지젝과 발터 벤야민. 그리고 김연수와 박민규. 내 뒤의 든든한 유령들처럼 느껴진다.
어제 나는 반디앤루니스 전체를 배회했다. 책에 대한 편식을 마친 지금은 거의 모든 코너 사이사이를 배회한다. 한국문학에서 세계문학으로, 고전소설에서 현대시로, 철학에서 언어학으로, 사진에서 연극으로, 영화에서 건축으로, 프랑스어에서 여행에세이로, 세계사에서 민속학으로. 그런 배회는 나쁘지 않은 방황이다. 방황이란 건 나쁜게 아니다. 여행을 할때에나, 대형서점을 배회할때에나.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여행 중에 길을 잃지 않으면 그곳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나는 책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몰라 방황하는 것처럼 어떤 책도 집어들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냥 책들의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의 어지러움과 깊이, 넓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목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무엇을 공부해야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짧은 그 순간의 느낌일 뿐이다. 책들에게서 벗어나면 금새 그걸 잊어버리니 말이다. 그렇게 배회하다보니 갑자기, 내가 유령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나중에 죽어서도 나는 유령처럼 이 사이를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면서 나는, 유령의 영화를 찍고 싶어졌다. 갑자기 슬퍼졌고 또 가슴이 가난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배회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유례없는 황사 때문에 밤하늘에는 먼지가 가득할 것 같았다. 그게 싫어서 골목길 사이로 뛰어왔다. 먼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는 이 세상이 먼지로 가득하다는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