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사진론에 대한 메모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에 대해 벤야민은 사람의 얼굴로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을 찍은 사진으로부터 '아우라'를 없앤 작가라고 말하고 있다. 당대의 초상화적인 미술 전통과 절연하고 '유형학적 사진'의 계통을 창시한 최초의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 그는 사람의 얼굴들을 일곱가지로 분류해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다. '대지'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멀어져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교육과 능력주의 "대중교육은 신분과 계급에 따른 교육의 차별을 일소하고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모든 대중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지적 차이를 해소하고 지식에 대한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형식적 조건이 마련된다. 그러나 대중교육은 성과주의와 결합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내적 분할과 차이의 체계를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이에 따라 대중교육은 지적 차이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中 "도대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논리학의 명제들 중 가장 신성한 명제가 아닐까. 좀처럼 논리학에 대해서는 정이 가지 않는 나같은 비논리적인 사람에게도 이 명제가 갖는 아우라는 대단하다. 이 말은 확실히 어떤
도덕과 윤리에 대한 메모 윤리란 <윤리>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왔지만, 그것만큼 근원적인 주제는 없다. 그러나 아주 쉽게 '윤리'는 거부당해왔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직 '도덕'으로서만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덕과 윤리를 동급이거나 거의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얼마전에 가카께서 말씀하시길 "국민들이 도덕적으로
롤랑 바르트의 문장론 소설이라는 매체에게 있어서 '의미'란 '생산' 가능한 것일까? 그러니까 작가가 소설을 쓸 때에 '의미'라는 것을 염두해두고 그것을 창작해나가는 것이 가능한 것(의미있는 것)일까? 요컨대, '교훈'이란 생길 수 있는 것일까? 나는 항상 이 의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읽기'란
알바하다가 메모 : 기러기아빠, 헌신, 사유, 네그리주의 기러기아빠 신자유주의에서 '가족'이란 쉼터가 아니라, 인적자본을 만들어낼 하나의 공장 같은 곳. 집은 더 이상 피로회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하늘'도 아니고, 모권 앞에서 단순한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인간이 된다. 자식을 얼마나 잘 키워냈는가가 해당 사회에서 얼마나
안개 속에서 책읽기 "나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 스피노자 1년 전부터 나는 책들을 여러권 펼쳐놓고 조금씩 조금씩 한꺼번에 읽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확실히 시험공부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 스며드는지 모르지만, 안개처럼 글자들이 스며드는 것 같다. 나는 안개를 좋아한다. 새벽녘 어스름의 안개가 좋다. 그런데 서울의 안개는 나쁜 공기라고
『안티고네』에 대한 노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대한 자끄 라캉의 지적들에 따르면, <안티고네>에서 코러스가 안티고네를 "자신 스스로 자신의 법이 되는 자"라고 말한 바, (cf. 'autonomos') 이에 대해 라캉은 안티고네의 자살이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의 승리"이라고 말하고 있다. 안티고네는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비극적 죽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