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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llection of 14 issues

마카오에서 말로를 만나다

군대에서 낙서 쓰듯 남긴 소설(?) 그날 밤 무작정 부서진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 담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뭔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나로서는 순순하게 복종은 하더라도 절대 후퇴 같은 건 하지말자는 게 인생의 지론이었으므로 그 상황에서 다시 돌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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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 거주지에서의 사죄

고되고 어두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며칠째 밤이 계속 되고 있었다. 예하부대 X대대의 모범병사 이은X 병장은 자신의 거칠디 거친 생활에 대해 하소연을 쏟아놓았다. 우리는 아주 늦은 밤, 아무 불빛도 없는 암흑 속 깊은 참호 속에 몇 시간째 대기 중이었다. 아무 소리없이 대대장이 나타나 왜 교대시간이 되었는데 계속 이곳에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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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시험장

워드프로세서 1급 자격증 실기시험장에 갔다. 모두들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나도 마찬가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나는 자격증 포상휴가를 위해서였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는 '자격증'이라는 이벤트를 이용해 20대의 정서불안을 자극한다. 가만히 있어도, 쉴새없이 토익책을 넘겨도 뒤쳐지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자격증을 따는 행위는 일시적인 안위를 안겨준다. 단지 플라스틱 조각 하나일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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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말하자면 원형천정은 바로크풍이며, 사람 다섯이 서로 손을 잡고 감싸안아야 겨우 마크할수있는 고딕풍의 기둥이 있었다. 게다가 10미터는 넘을 것 같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는 까무잡잡하게 중동인의 피부를 한 예수가 죽어가는 모습이 있는, 중앙의 거대한 홀. 바이올리니스트는 인터내셔널가를 연주했고, 로비 정면의 문은 뻥 뚫려있었다. 사람들은 자유자제로 그곳으로 들어왔다. 이태리제 정장을 입은 부르주아 신사들, 고귀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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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의 토악물

이곳은 우리들의 마지막 요새로서 지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적들의 레이더망을 벗어난 곳에 있었음이 틀림없었으나, 불행히도 어떤 스파이에 의해서 우리의 위치는 발각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입구를 지킬 결사대를 꾸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십수명으로 꾸려진 수류탄 결사대가 바로 우리들이었다. 우리들은 겨우 수류탄 수십개만으로 입구로 향했다. 적들은 족히 수백, 아니 수천명에 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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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아케이드

거대도시의 지하 아케이드 아케이드 밖은 암흑과 검은 비 뿐일 것이다 이번이 몇번째인가 아케이드의 막다른 골목에서 H를 다시 만났다 행복한 기대와 두려운 예감이 끊임없이 머리 속에 교차했다 이 혼란은 색맹처럼 세상을 알록달록하게 색칠해주었다 사이키한 루프라이트가 머리 위에 떠돌았다 H와 나는 말없이 지하 아케이드를 계속 같이 돌아다녔지만 옆에 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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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

너는 영웅처럼 멋지게 날지 못해 하지만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지? 빼곡하게 깨진 병 조각들이 꽂혀있는 울타리를 훌쩍 넘어서 구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잖아 그러니까 자유롭게 날 수 있잖아 말도 안되는 비난들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날아가버렸다 산넘고 물건너 서울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난다 내가 집집마다 불이 꺼져있었고 마을들은 폐허로 변해있었다 서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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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나비

이곳에는 기분 나쁘게 생긴 흑색 나비들이 많아요. 날개를 퍼덕거리며 제멋대로 날아다니고, 우리가 걸어갈 때 아주 종종 우리의 시선을 방해하며 공기를 휘젓지요. 그러다가 기분 나쁜 그들을 쫓아내려 발을 내딛으면 얌체처럼 포플러나무 뒤로 사라져버리지요. 어쩔때는 박쥐로 착각될 때도 있을 정도랍니다. 더럽고 얌체같은 박쥐나비 새끼들. 기분 나빠. 물론 걔네들의 진짜 이름이 박쥐나비는 아닐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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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도단

사육사의 달콤한 사탕에 길들여진 사자는 생각했다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채로 끊임없이 미래와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두 눈은 붉게 충혈되고 어지러운 상념들은 거짓말쟁이들의 달콤한 말들을 숨쉴틈 없이 상기시키겠지 그때마다 사자들은 구속되지 않는 채 또렷한 정신을 유지해야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가상 세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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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설모

모두들 숨죽여요 순수한 네 영혼이 구역질나는 썩은 잎사귀를 쏟아내는구나 북쪽 산 너머에서 드리우는 먹구름 총알들이 뚫고 지나가도 나무 위로 오르는 너는 자비심도 없이 한가롭게 흩어진 심장을 찾는 나는 오늘도 어색하게 스치는 얼굴들과 뉴스들 차가워진 가슴을 쇠망치 들고 두드린다 억세게도 짖누른다 파시스트들의 천국에서도 네가 오를 나무는 있을테지 입술 아래로 검붉은 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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