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희의 <삼포 가는 길>, 떠나가는 연인을 바라보는 카메라

학교 도서관에서 <삼포가는 길> DVD를 보았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본 작품이고, DVD로 제작된 것들 중엔 유일하게 도서관에 있었다. 이 좋은 영화를 왜 여지껏 못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조차도 사실은 한국의 옛날 영화들에 대해서 일정한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연호 선생님으로부터 DVD를 선물받아서 본 <하녀>(1960년, 김기영 연출작)에서 그 편견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만희의 영화들도 내가 지닌 편견을 와르르 무너뜨릴 것 같다.
이 영화는 저 유명한 황석영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영화와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고, 에너지를 투여하는 지점도 소설과 조금 차이를 갖는다. 어떤 면에서는 원작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쏟아내는 지점이 있고, 변곡이 보다 더 다양해서 영화적인 리듬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 내가 정말 놀라웠던 시퀀스는 세 남녀가 시골의 어느 삼가집에 가면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완전히 편집적인 리듬감으로서만 처리하고 배경음악으로 기이한 음악을 깔아놓은 부분이었다. 이 시퀀스는 가히 영국 앵그리영시네마를 떠올리게도 한다. 요컨대 영국영시네마의 대표적인 작가 조셉 로지의 <트로츠키 암살>(1972) [cf. "<트로츠키 암살> - 아무것도 아닌 자가 죽였다!"]의 초반 시퀀스와 종반부에 벌어지는 암살 이후의 몽타주들이 <삼포가는 길>과 기이하게 겹치는 것 같다. 이 시퀀스만이 갖고 있는 이상한 엇박자 리듬이 어떤 '틈', '공백', '결여'같은 걸 느끼게 한다.

옛날 농촌에서나 유지되고 있었던 삼가집에 세 남녀가 들어간다. 들어가서 밥이나 얻어먹어보려는 심산으로 말이다. 여기서 죽은 이의 지인임을 인증 받기 위해 백일섭이 밑도 끝도 없이 통곡을 하고 영전 앞에서 울어대는데 아무도 그를 모르더라도 그렇게 곡하는 이를 의심할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면서 일섭이 다른 일행과 함께 삼가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그러면서 술도 먹는데, 갑자기 '백화'가 젓가락을 두드리며 신나는 노래를 불러대니까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버럭 소리치며, "저 놈들 잡아라!"한다. 그러자 갑자기 소동극이 펼쳐지는 것이다. 정말 재미있는 장면이다. 여기서 갑자기 하얀 눈밭까지 도망쳐나오는게 참 웃기고, 그 다음에 백화가 허리를 삐끗했다며 쓰러지는 장면도 진짜 웃기다. 어떻게 이렇게 찍었을까. 정말 입을 쩍 벌리고 감탄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만희는 정말 대단한 감독이다! 이런 걸 두고 비교하는 게 참 웃기지만, 어떻게 보면 확실히 조셉 로지보다도 더 낫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는 배우 백일섭의 젊은 시절의 매력이 물씬 느껴진다. 그는 정말 한국영화사에서 보배와 같은 캐릭터이다. 그런 좋은 배우가 정치적으로 헤까닥해서 한나라당 극우주의자들의 얼굴 마담으로 놀아나고 있다는 점은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쨌든 나는, '백일섭'을 '배우'로서만 기억하기로 했다. 예전에 우리가 어린 시절에서 MBC에서 했던 최고 인기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그의 술주정뱅이 아버지 역도 참 매력적이었지만, (그 드라마에서 그는 수도 없이 "홍도야~ 우지마라~ 아 글씨, 오빠가 있다~" 가락을 흥얼거린다.) <삼포 가는 길>에서 보여준 과거에 대해 일정한 상처를 지니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지 못할 정도로 증상적이면서도 코믹스러운 양면모를 지닌 캐릭터의 연기는 정말 매력적이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서 그가 버스에서 여수로 가는 인부들을 만나 그들과 팔씨름을 겨루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도 정말 독특하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그 어느 한국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었던가.

'백화'역의 여배우 '문숙'은 저 당시에 아마도 스물한살 즈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이 영화의 대성공을 끝으로, 배우 생활을 마치고 홀홀단신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자신이 믿고 따르던 이만희 감독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고 바로 한 달 즈음 후, 병으로 죽었기 때문이었다. 영화감독으로서는 너무 젊은 나이에 죽었고, 그가 남긴 마지막 영화로서는 너무나 슬프고도 행복한 영화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백화가 기차에 올라타 서울로 떠나는데, 두 남자는 떠나고나서도 그녀는 그 기차에 타지 않고 그 고장에 남아 역전의 어느 술집에서 일을 맡으러 가려는 듯 움직인다. 그녀가 떠나버린 두 남자의 사라진 흔적, 그 빈 공간을 바라보면서 슬프게 서있는데, 카메라는 계속 한 자리에 남아서 그녀를 보는 듯 하다. 그녀가 떠나가도, 카메라는 '역'에 남아있다. 마치 곧 죽을 것임을 알고 있는 '문숙'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 이만희 감독이 그렇게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문숙씨는 이만희 감독의 연인이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에 대해 뜨겁게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감독님은 영화를 찍을 때 시나리오나 원작을 자신의 삶에 대한 것으로 완전히 다 바꿔버리세요. <삼포가는 길>도 그런 경우죠. 로케이션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은 다 대본을 바꾸는 시간이에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제가 평소에 잘 쓰는 말을 집어넣어서 대본을 완전히 수정하셨어요. 사실 그 영화 찍으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설날이고 보름인데 모두 집없이 한달을 떠돌아다니며 영화를 찍었죠. 모두 허기지고 피곤해서 거지가 된 듯한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바로 그런 상황과 느낌을 날것 그대로 찍어요. 배우들도 자기들이 알아서 대사를 만들어서 연기를 하게 했어요. 그게 바로 이만희 감독님의 천재적인 면이라고 생각해요. 연출을 안 해요. 생생한 감정을 사람들에게서 끄집어내서 기록하는 거죠.” (배우 문숙)
이만희 감독의 다른 영화들도 보고 싶다. 지난 학기에 영상자료원에서 <휴일>을 보고 온 친구들이 극찬을 했었는데, 가장 먼저 <휴일>을 보고싶고, 다른 작품들도 보고싶다. 또 김기영의 영화들도 모두 보고싶다. 이번 여름은 한국 고전영화와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서울아트시네마, 7월28일까지)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