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의 <안녕하세요>

오즈 야스지로의 <안녕하세요>

아이들이 침묵한다. 아마도 중1정도 되어보이는 형과 초등학교 1,2학년 정도의 동생이 제 부모에게 텔레비전을 사줄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학교에 가서도, 이웃의 어른들에게도, 영어 과외 선생님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버릇없는 땡깡일뿐인가? 대단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땡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즈는 이런 아이들의 땡깡 아래에 숨겨진 어른들의 윤리에 대해 풍자하고 있다. 오늘 작가연구 수업시간에 본 이 영화는 내가 본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 중 가장 코믹한 영화였다. 오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비로소 오즈적인 형식미가 무엇인지 아주 어렴풋하게 감지되는 순간이었다.

오즈 야스지로는 로베르 브레송과 함께 영화적인 형식을 가장 극단적인 지점까지 밀어붙인 위대한 영화 작가 중 한 명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통속적 드라마 장르의 연출가에 불과했던 오즈 야스지로가 비로소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프랑스 누벨바그의 평론가들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이 발견은 가히 혁명적인 발견이 되었고, 오늘날 오즈 야스지로는 영화 교과서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작가들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이 영화 <안녕하세요>는 1959년작으로 컬러영화이며, 형식적인 원숙미를 뽐내는 영화이다. 카메라는 한 마을의 골목을 경계로 삼고 방과 방, 집과 집 사이를 능란하게 넘나들며 카메라 스스로 내러티브 자체를 구성한다.

철없는 땡깡일수도, 또는 어른들의 말-세계에 대한 침묵시위일수도 있는 아이들의 침묵 선언은 허위적이고 위선으로 가득찬 어른들의 말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마을에서 하나의 파열음을 내는 '코미디'가 된다. 아이들이 말을 하지 않음으로서 그들은 스스로 고난을 겪고 또 한편 어른들은 이 파열음에 의해 자신들이 구성하고 있는 위선적인 공동체-윤리의 실체를 스스로 드러내게 되는데, 이것이 '텔레비전'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게 참 재미있다. 아마도 당시 텔레비전은 새로운 세대와 과거 세대의 경계를 나누는 지표였을 것이다. 아이들은 명백히 전후세대이고, 어른들은 전쟁세대인데 실질적으로 텔레비전의 내성 자체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지만 이 텅 비어있는, 물음표 덩어리의 물체가 마을 전체를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시대적 지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어쩌면 텔레비전은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위선적 세계를 비뚜로 바라보게 하는 창일지도 모른다. 거기에도 또 다른 세대의 위선과 허위적 이데올로기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다른 지층의 것이고, 어른들의 말들의-세계와도 다른 것일테니 아무래도 좋다. 오즈 야스지로의 시선이 놀랍다. 지독하게 하나의 시선을 유지하는데 그게 뭉치고 뭉쳐서 그 카메라 시선의 각도 자체로 전통 안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카메라가 바라보고 재구성하는 세계의 풍경이 일본 사회의 전통적 질서와 현대적 개입이 섞이기 시작하는 이 시공간이라면, 카메라는 확실히 그 지독한 쇼트-구성으로 이미 이 모순성 안에 깊숙하게 스며들어가게 된다.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서 오직 표피 그 자체로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표피, 표면, 표층. 카메라가 뚫어지게 응시하며 무언가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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