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의 <유령 작가>

로만 폴란스키의 <유령 작가>

오랜만에 보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이다. 분명히 폴란스키만의 것이 있는 영화다. 히치콕 영화의 스릴러적 장치의 면모들이 여지없이 발현되고, 동시대성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중간중간에 쏟아져나오는 영국식 유머는 불편하지 않게 이해가능하며, 연기도 다들 괜찮고, 추격신도 훌륭하며, 결말이 주는 어떤 미묘한 비극성과 공백도 '유령'의 다른 의미를 추출하게 한다는 점에서 썩 괜찮다고 생각한다. 출연배우도 이완 맥그리거랑 피어스 브로스넌인데 이 정도면 훌륭한 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개봉 성적은 참패에 가깝다. 왜 이럴까. 그런 면에서 오늘은 '독설'을 쏟을 수밖에 없다.

인터넷상에 오른 네티즌 평점이 말도 안되게 낮다. 단발마적이고 말초적인 것이 길들여진 요즘 관객들의 구미엔 확실히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드러내는 스산하고 음침하며 내재된 음모의 분위기가 전혀 말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근원적인 감정을 내재하고 있고 정치 풍자도 곁들여져있으면서도 스릴러를 잘 살리고 있는 이 영화가 이처럼 인정받지 못하는건, 오늘날 '영화' 뿐만 아니라 '장르영화'조차도 얼마나 위기에 쳐해있는지 감지하게 해준다. 얼마전 연출초급 수업이 종강하던 날, 충무로의 현역 감독이신 H 선생님께서는 '이야기'만 좋다면 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고 관객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하며 말한 바 있다.

정말 그러한가. 확실히 그는 순진하고 뭔가 사태를 한 방향으로만 보는 오류에 빠져있다. 한국영화가 잘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단순히 '이야기'탓으로 돌리는 건 완전히 순진한 태도이다. 그날 내가 H 선생님과 쓸데없는 논쟁을 하다가 빼먹은 게 하나 있다면, 오늘날은 이야기조차도 중요하지 않은 시대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말초신경만 자극하면 된다. 네이버 영화평란의 무수한 댓글들을 보라. 이 영화가 2시간 내내 긴장감을 자극하지않는 것에 대해 불평하거나, 극장을 나설때 다들 루즈했다고 말했더라는 것이 대세이다. 정말 욕지거리 나오는 멍청한 소리지만, 참아야지. 왜냐하면 그렇게 열을 내면서 까지 옹호해줄만한 "위대한 걸작"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장르영화로서 최고조에 이른 '장르영화'를 인정못하겠다는 식의 분위기에 실망스러움을 느낀다. 언제부터 스릴러 공식이 '반전'에 쏠리게 되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싸구려 감성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러다가 아예, 포르노랑 고어물, 인디팬던스데이풍의 영웅물만 보겠네.

폴란스키가 개인적 좌절들을 겪다가 만든 영화라서 나름 궁금했는데, 정말 그럴듯하게 비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면서도 장르적인 규범에 충실하고 유머와 풍자도 넘쳐흐른다. 게다가 스릴러 영화의 면모를 훌륭하게 갖추고 있다. 역시 거장답다. 스콜세지 할아버지가 말년에 만든 <셔터 아일랜드>에서 삐끗한 것에 비하면 월등히 낫다고 본다. 그러나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기회는 거의 남지 않았다. 2개관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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