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과 반유대주의, 폭력의 기원

하이퍼텍 나다에 가서 <하얀 리본>을 보았다. 미카엘 하네케의 최근작이고 2009년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그러나 하네케가 황금종려상을 받지 않았더라도 나는 이 영화를 열광적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네케 영화를 엄청 좋아하기 때문이다. 특히 <늑대의 시간>과 <미지의 코드>는 내게 엄청난 감흥을 주었었다. 국내에서 많이 알려진 <피아니스트>나 <퍼니 게임>도 분명 걸작이다. 아무튼 하네케는 항상 세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적 '걸작'들을 만들어왔다.
두번째 보았다. 사실 연초에 어둠의 경로를 통해 한번 보았고, 제대로 본건 이번이 처음이다. 다시 봄으로서 제대로 볼 수 있었고, 영화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어둠의 경로는 좋지 않다. 이 영화를 보고서야 앞으로는 최대한 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모든 빛이 차단된 어두운 극장에서 익명의 사람들과 함께 필름으로 제대로 보는 것과 집에서 어둠의 경로로 구한 파일을 플레이해서 보는 건 천지차이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있음
내가 본 바, 이 영화는, 이미-시작 되었던 반유대주의의 어떤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무수한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니까 영화의 서사가 담고있는 세세한 인과관계들, 플롯 상의 구획들에 대해서는 분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영화가 담지하고 있는 스타일 자체가 '그것'을 드러내는 최상의 것을 갖고 있고, 1913~14년경 오스트리아 제국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이 미세史로서, 유럽 反유대주의의 기원을 감지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주 추상적이고 거시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참혹하고 잔인한 면모' 따위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이 영화가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과거', 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는 것으로 환기될 수밖에 없는 '과거'의 공기들 때문에, 유로피안들의 체증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영화에는 단 한명의 유태인도 등장하지 않으며, 영화의 시기 자체도 2차 세계대전 직전이 아니다. 도리어 나치즘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곤 하는, 1차 세계대전 직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배경'인가? 그렇지 않다. 이 영화에서 행해지는 이 잔혹사의 주역들이 바로 '아이들'이라는 점, 그리고 그 아이들이 결국 스스로 자행한 잔혹한 사건들을 경과하고나서 세계 전체를 처참한 살육의 장으로 끌고간 첫번째 세계대전을 거치게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나서 그들이 어른이 되면 그들이 사는 땅은 다름아닌 색다른 정치적 운동의 광풍 아래 휩싸이리라는 것이 상기된다. 한국의 관객으로서는 이 모든 '역사'-관계망들을 미리 알지 않고서는 떠올리기 쉽지 않지만, 유럽인들에겐 익숙할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생각하게 되는데, 反유대주의는 항상-이미 잠재되어있던 것이 아닌지 되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골 촌구석에서의 가부장 질서, 폭력, 복수, 치정, 분노들이 한데 뭉쳐서, 하나의 공동체의 이데올로기가 재구성되고, 그에 따라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차츰차츰 '차이'(나와 다른것, 혹은 '우리'와 다른 것)에 대한 부정으로서 '타인'을 사고하게 되지 않았는지, 그래서 결국 그것이 끔찍한 폭력의 역사(혹은, 또다른 '과거')를 낳게 된 것이 아닌지 되묻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때 '과거'는 이미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잔혹사 자체로서도 '완성'된다. 이미 우리는 아주 쉽게 '反유대주의'의 동학과 기원 자체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
만약 이 영화에 유태인이 등장하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이 유태인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이야기가 되었다면, 이 영화가 설령 지금처럼 시간적 배경을 '1차 세계대전'前으로 삼는다고할지언정 '유럽'에 '이미' 내재되어있었던/장착되기시작한 타자에 대한 배제의 이데올로기의 근간을 파악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은 고작해야 씹기도 좋고 버리기도 좋은, 착한 영화, 혹은 참으로 친절한 역사-영화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하네케는 그 모든 '직접적 설정'을 배제했고, 어떤 근원에 대해 밑밥을 까는 것 같다. 언제나 항상 유럽-사회에 첨예한 현재적 질문을 던져 논쟁을 일으켰던 그가 굳이 이 쌩뚱맞은 옛날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네케는 그 폭력성의 근원으로서, 공동체에 뿌리내린 '기독교'(혹은 '종교')의 '악성'을 등장시킨다. 아이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목사'는 아동시기의 지극히 당연한 비뚤어짐, 지각, 장난질, 자위행위까지 모두 통제하려고 하고, 그것이 모두 아이들이 순수함을 잃고 선을 잊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강력한 체벌을 가한다. 물론 그 목사는 대단히 엄격하고 절제력있는 강력한 가부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기독교적 규율, 얀세니즘 내지 루터교적인 강박성이 아이들에게는 '복수'와 '시기'의 감정을 낳게 된다. 영화의 가장 처음에 왜 의사는 누군가로부터 '복수' 당하는가, 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정말 왜 일까. 어쩌면 그가 딸을 성적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혹은, 그의 다른 부도덕함들이 어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것이 '아이들'에게 상속된게 아닐까. 어쨌든 그렇다면 그 폭력(처단)의 출발은 대단히 '율법'의 엄벌로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율법적 정의를 실천하는 '보이지 않은 권력'이 부도덕한 '의사'를 벌한 것이다. 엄격한 '도덕'의 감행 그 자체! 이것은 아버지의-이름으로 감행되어왔던 '도덕'이며, 자못, 아이들을 체벌하고 혼내는 그 '도덕'과 닮아있다. 도덕은 감히 어겨서는 안되는 무엇이고 이걸 어길시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정식 말이다. 의사도 같지 않은가. 그는 감히 어겨서는 안되는 도덕을 어겼고, 벌을 받았다. 얼마나 정의로운가.
그러나 우리 모두 알다시피 결국 그 '벌'은 폭력적 양태로 드러났고, 모든 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서 이어진다. 한번 율법적 정의를 '폭력'으로서 감행한 그 보이지 않는 실체는 다음에는 보다 더 쉽고, 빠르게, '정의'를 실천한다. 이 정의는 이제 기독교적 율법의 정의 카테고리를 넘어서 차이에 대한 배제로서 드러난다. 율법적 정의가 '도덕'으로서만 존재하는 이상,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모든 건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사실 모든 맹신도들이 제 나름의 '해석'을 가하지 않는가. 신앙에 대해서, 혹은 신의 말씀에 대해서. 목사가 아이들에게 행하는 말들, 혹은 남작이 마을 사람들에게 가하는 모종의 비전과 협박들도 사실은 이런 '해석'에 기반해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권력'의 행동도 제 나름의 해석에 기반하지 않겠는가. 남작의 착한 아들은 정말 재수가 없고, 또 산파의 아들이자 장애아인 '칼'은 "우리"와는 너무 다르게 생기고 또 부도덕을 행하는 어른들의 자식이므로 벌받을만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제 모든게 확연하게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이제 폭력은 '다름'을 향해 있다. 오직 '타자'를 향해서 말이다. '타자'는 공동체의 규범과 규율을 위협하는 존재로서만 다가올뿐, 함께 어우러지고 사랑을 나누어야할 '동무'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타자'는 항상, 반드시, 배제되어야만 한다.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가 새로 생긴 금융가 연인과 살겠다고 선언하는 남작부인과 남작이 언쟁을 벌이고 있을때, 관리인이 찾아온다. 그는 남작에게 긴밀히, 어떤 소식을 알린다. 사라예보에서 황태자가 암살 당했다는 소식을 말이다. 마치 이 모든 폭력 관계의 결말이 파국적으로 치달아갈 그 순간에 말이다. 이 '뉴스'가 그 순간 남작에게 알려진다는 설정은 결국 이 영화 <하얀 리본>이 단순히 한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인간들의 잔혹했던 이야기에 관한 '기억'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것은 어떤 역사의 '기원'이며, 그 시기 유럽 전체를 장악했을런지도 모르는 공동체적 인간사의 단편이다. 발터 벤야민은 '기원'(the origin)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the origin)은 지금 일어난 일이 시작되었던 어떤 지점이 아니다. 기원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자체다."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다. 요컨대 벤야민이 인용한 칼 크라우스의 말에 의하면, "기원은 목표이다." 즉, 우리 뒤에 깔린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당도한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벤야민적인 시각으로, 즉 미래를 정향적으로 바라보는 진화주의(혹은 진보주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현재, 미래가 '여기'에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기원'은 칼 크라우스의 말처럼 당도한 "목표"가 된다. 벤야민은 일찍이 시간, 역사, 그리고 기원을 새로 정립하려고 하였다. 다시 말해 '기원'은 지금 일어난 일이 처음 일어났던 장소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자체가 기원이 되는 것이다. 즉, The Time of Now, <지금 이 시간>이 말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미시史가 '전체주의'의 '징후'라는 결말에 당도하게 되었을때 우리는 다시 어떤 함정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말함으로서 우리는 다시 이 영화와 그 해석 자체를 '옛날이야기'로 전락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담론계를 지배하는 목적론적 해석 혹은 목적론적 비평이 야기시키는 거대한 함정이다. 따라서 그런 말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고, 우리 안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현재'의 또 다른 이야기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 <하얀 리본>이 던진 질문은 바로 영화를 본 우리들에게 되돌아온다. 마치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우리들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증명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오늘날 국가(혹은 법, 자본주의, 실용주의...)라는 '아버지'밑에서 아이들처럼 움츠린 채 거대한 "하얀 리본"을 달고 살고 있지 않은가, 라고. 하얀 리본을 거부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괴물이 될 것이다. 저 '아이들'처럼 말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미 괴물이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이미'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 거대한 순환의 '역사'를 끊어내야만 한다. 단절하고 중지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전진하는 것이 아닌게 된다. 역사는 잔인하고 슬픈 이야기의 끊임없는 순환 그 자체이나, 우리는 그것을 중지시켜야만 한다. 다시 '해석'에서 '실천'의 몫으로 돌아간다. 하네케의 숨막히는 미스테리극에서 숨막히는 현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