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의 <시>

굳이 <시>에 대해 ‘노무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모두들 ‘노무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문성근의 언급과 김미화의 인터뷰 이후에 그것은 “촌스럽게 뭐 그런걸 묻고 그러냐.”는 식의 반응들로 무마되었으나, 어떤 ‘합의’가 없었다면 그런 침묵도 가능하지 않다. 나 역시 어떤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굳이 텍스트의 바깥으로 끄집어와 우격다짐식으로 상징고리나 은유를 대입시키는 해석들에 대해 별로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미,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한다. 우선 나는 <시>와 비평적 담론생산자들의 ‘치매’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궁금하다. 아니 그 암묵적 합의가 무섭게 까지 느껴진다. 여기에 모종의 자기 위안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는 죽음에 대한 가해와 연루된 자의 고통에 대해 말함으로서 불러일으키는 ‘반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나 역시 영화를 보고나서 한동안은 그 감동에 푹 젖어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얼마간 감동에 젖어있다가 <시>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목소리들을 듣다보니 점점 의심이 생긴다. 생각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와 불편함이 무럭무럭 생겨났고, 그것은 최근에 와서 재생산되는 무수한 ‘죽음’을 추억하는 텍스트들과 무관하지 않게 증폭되었다. 그리고 이제와 굳이, 그 의심을 ‘비행청소년’의 입이 되어 적반하장식 반발로 쏟아내고 싶다. 도리어 ‘비행청소년’을 다시 데려와 그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이 남다은 평론가나 정한석 평론가가 언급한 영화 말미의 ‘불편함’내지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에 뒤따른 찬사들에 대한 중요한 반문은 이것이다. 왜 아무도 가해자인 ‘소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까. 서사 안에서 왜 소년의 감정과 미래는 ‘생략’되어야 하는가. 이창동 감독은 그것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10대들을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어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읽는 자들’인 우리들은 가해자 소년 종욱에 대한 ‘생략’적 태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단순히 서사에서의 선택과 집중의 문제일까, 아니면 좀 더 파고들어가서 왜 그래야 했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까. 나는 마땅히 후자쪽이라고 생각한다. 미자라는 이 ‘위대한 인간’이 사과를 먹어치우듯 말끔하게 먹어치워 버리는 태도로 소년의 존재 자체를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외손자 종욱이 밤늦게 모인 친구들과 모종의 ‘대책회의’를 진행중일때 부엌에서 사과를 응시하던 미자는 아이들에게 사과를 권유했다가 되려 거절 당한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사과는 역시 보는 것보다 깎아먹는 거야.” 미자에게 사과는 ‘보는’ 대상이 아니라 ‘먹어버리는’ 대상인 것이다. 김영진 평론가는 그것에 대해 그녀가 아직 “미적 세계의 입구에 들어서지 못한” 것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단지 캐릭터의 변화에 대한 통과지점으로 생각하기엔 차후의 찜찜함이 해소되지 않는다.
결국 모든 합의가 종결되지만, 미자의 고통은 극복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다른 가해자들의 부모의 무상성, 무관심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건 사실 억지스러워질 여지가 많기도 하다. 정말 다른 가해자들의 부모들은 미자와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망각해버렸을까. 그러니까 영화의 시선 자체는 그네들의 고통에 대해 보여주는 것은 생략하였지만, 영화를 보고 ‘고통들’에 대해 생각하는 관객인 우리들마저, 그들의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해 쉽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일단 좋다. 이 점은 속아 넘겨주는 셈치고, 사과를 먹은 미자에 대해 생각해보자. 미자의 시쓰기 강습 강사인 시인 김용택은 시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하냐는 질문에 “잘 봐야한다”고 대답한다. 만약 ‘시’가 ‘고통’이나 ‘삶’으로 치환될 수 있다면, 우리는 고통이나 삶에 대해서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으리라. 진정 치유하고자 한다면 고통은 뚫어지게(혹은 삐딱하게라도) 응시해야하며, 삶은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사과를 먹어치우는 미자의 태도가 이후에 고통과 대면하기를 그쳐버리는 종결 지점에 대해 어떤 암시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녀가 정녕 고통과 대면하기를 택했다면 결코, 외손자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자가 자신의 고통을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키고 마침내 죽은 소녀와 강가에서 ‘아름답게’ 마주치고 운명적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이 영화의 결말이지만, 만약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알츠하이머 병에도 걸리지 않은, 게다가 창창하게 젊은 외손자 종욱에 대해 생각한다면, 이 시는 아름답지도 않을지언정 고통의 외면에 가깝지 않은가. 차라리 이것은 진리가 되는 ‘대상’ 자체를 먹어치우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자꾸 눈에 밟히면 고통스럽고 자기 자신의 외상성이 드러나므로 모든 걸 잊고 망각해버리고 싶은 것이다. 만약 자신의 병에 대해 정녕 ‘삶의 의지’로 대면하려 한다면 이런 식의 망각 의지와는 정반대의 태도로 대면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자못 진지해보이면서도 사실은 고의적 망각에 가깝고, 어떤 면모에서는 잔인함마저 느껴질 정도이다. 가히 ‘종말기’의 시민들을 떠올리게 되지 않는가. 비극에 당도한 인간의 태도로서는 아주 ‘훌륭’하지만, 비로소 종말기에 도달하고야만 오늘날의 우리들마저 이래야 하는가? 때때로 세상에서 잔인한 사건들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죽은 이에 대한 ‘일치’의 태도가 아니라, 상처와의 대면이 아닐까? 그러나 <시> 이후에 그 누구도 미자의 태도에 대해 ‘외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비평가이건 평범한 관객이건 미자의 ‘아름다움’과 시를 받아들이는 종말기적 태도에 대해선 다분히 낭만주의적이기‘만’하다. 20대 혹은 그 아래 세대를 대하는 일관된 방식이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참으로 죄송스럽게도 이것에 대해 굳이 명명하자면 ‘386적 태도’가 아닐까. 그들은 너무도 완고하고 집단적이어서 다른 세대(특히 아래 세대)를 명명하거나 규정하는 것에 대해 즐기곤 한다. 요컨대 “88만원세대”라든지, 혹은 “촛불 세대”라든지. 자신들의 서사에서 바깥으로 내놓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어떤 유명한 사람’의 ‘스펙타클한 죽음’이 있었다. 그걸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어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저 유명한 ‘386세대’이다. 나는 여기서 굳이 그들을 ‘세대’라고 호명하고 싶지 않다. ‘공동체’라는 경계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대’라는 경계가 그들을 좀 더 타당한 위치로 끌어올려주기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세대론은 ‘386’이라는 집단의 담론이다. 처음에는 자기들 자신을 호명하며 명명했고, 그 다음엔 아래 세대를 ‘88만원세대’나 ‘촛불세대’라고 명명하며 ‘타자’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는 종욱이 ‘88만원세대’이기보다는 ‘촛불세대’이므로 그것에 국한시켜서 말해보겠다. 아마 이 세대론은 ‘촛불세대’의 고통들보다는 아름다움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386’이라는 집단에 의해 규정된 촛불세대는 이렇게 ‘청소년 집단 성폭력’도 자행하고, 비행에 빠진 부도덕한 집단이다. ‘386집단’이 볼 때 그들이 진정 아름답게 거듭나려면 ‘촛불’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자꾸 부도덕한 짓을 하니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이 끔직한 부도덕을 바라보는 시선은 고통의 대면과 공유가 아니라 관조 내지는 꾸짖음이다.
문제는 그런 아이 중 하나가 나의 ‘외손자’라는 것에 있다. 자꾸 걸리적거리는 외손주 종욱 같은 애들이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답지 못한가. 끔찍하기 짝이 없다. 이 ‘가해’와 ‘고통’의 또 다른 소재로서 우리는 최근에 만연한 청소년 성폭력 사건들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오직 ‘여전히’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집단과 세대로 남고 싶은 사람들이 혀를 ‘끌끌’차고 근심하며 가해자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욕지거리를 하고, 피해자에 대해 고통을 끌어안기라도 한 듯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런데 <시>의 이런 밖으로 끄집어져 나오는 ‘집단성’을 둘러싸고 남겨지는 감상들 역시 딱 그 정도인 것이다. 아마도 한 세대 더 건너 올라간 미자의 위치 ‘덕분에’ 미자의 고통과 연대의식을 갖더라도 자기들이 낳은 자식은 아니라는 생각에 위안을 얻을 것이며, 결국 그 모든 고통을 끌어안기라도 한 듯이 경찰에 신고하였다는 도덕적 우월의식 덕분에 ‘아름다움’ 속에 파묻힐 수 있어서 좋았을 것이다.

미자가 종욱을 신고해버리고 아름답게 강으로 가서 죽은 자와 대면한 덕분에, 종욱은 평생 “왜 자신에게 다시 묻지 않았는가” 생각하며 사랑받지 못한 자신의 결핍 때문에 괴로워할 것임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런 ‘폐기 처분’ 상태는 정말 그가 가장 부도덕한 범죄의 가해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어떤 ‘숭고한’ 아네스를 죽게 하였기 때문에 망각하여도 될만한 것일까? 그러기엔 너무 이 아픔이 크고, 무책임하게 보인다. 우리(어린 아이들)는 그 가해자들과 더불어, 혹은 가해자로 명명된 그들은 윗 세대의 완고하면서도 도덕적으로 우월한 공동체가 역사 너머로 사라진 이후에도, 이 절망의 세계를 계속 살아갈 것이다. 가해자에게도 만약 ‘도덕’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남다은 평론가가 <시>란 “타자의 죽음 이후 죽음과 함께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영화라고 했을 때 그것이 온당한 지위를 차지하려면, 우리는 그 고통스러운 질문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질문을 던져야 한다.
미자의 행동은 아무래도 도피적이다. 소녀의 어머니를 찾아가지만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못하며, 부동산에서 최종적 합의의 분위기에 도달해 다시 마주쳤을 때에도 울면서 뛰쳐나간다. ‘인간주의’적으로 우리는 그런 도피들에 대해 위로를 보내주거나 동질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도피의 책임감이 무화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미자는 끊임없이 ‘고통’을 상기시키는 존재로서의 ‘종욱’을 ‘아름답게’(배드민턴을 치다가) ‘폐기’시키지 않는가. <시>라는 영화가 정말 상기한 질문이 던져지는 영화라면, 이 영화의 대답은 ‘도피’이며, 그에 대한 해석들도 모두 ‘도피적’이다.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미자가 아니라, 남겨질 우리들, 가해자 아이들과 가해자의 부모들이다. 이창동 감독은 이동진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어느 순간, ‘내가 뭘 남겼지?’ 싶은 느낌이 있잖아요? 내가 남긴 게 괴물이 아닌가 싶은 거죠. 새로운 세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서 당황하게 되는 것은 보편적인 경험일 거에요. 그게 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세대가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해 당혹스러운 느낌이 드는 거죠.”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여기에 어떤 윗 세대로서의 책임성이라는 것이 남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치워지지 않는다. 영화 안에서는 결국 이렇게 아름다워지고마는 미자의 거짓된 ‘고통’이 나는 불편하다. 다소 우악스러운 단언인 측면도 있지만 나는 그 아름다움에 일말의 ‘거짓’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종욱이라는 어린 소년과 다가올 시대의 남겨질 폭력들과 고통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 거짓이 표면 위로 부상한다. 그리고 고통마저 먹어치우는 이 무시무시한 식욕이 가히 무섭다. 증상들은 치유되지 못한 채 아래 세대에게 떠넘겨졌다. 다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던 미자씨, 당신이 만든 이 괴물은 어찌 하시렵니까?”라고 말이다. 그 괴물은 지금 철창 안에 갇혀있다. 종말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올 것이다.
2010년 6월 20일 한겨레 Hook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