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브레송의 <무셰뜨>

이 영화를 볼 당시에 나는 다른 수업(연출초급)에서 다르덴 형제의 영화 <로제타>에 대한 리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 나는 <로제타>를 참 좋아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영화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격정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대처럼 현실과 몽상, 의지와 열패감과 같은 극단적인 감정의 변화와 좌절감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나는 지금 스물여덞이니까-) 이런 영화가 정말 크나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스물여덞 전에 가장 힘든 시기였던 스물네살 때 이 영화를 보았는데, 스무살 이후 처음으로 영화를 보다가 울 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 너무 생생하다. 일곱살 때 2박3일동안 부모님과 여동생이 모두 외가집에 가서 혼자 집을 지켰던 그때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이상한 비극을 체험하며 슬픔에 잠겼던 어느 토요일 오후 텔레비전을 통해 케빈 코스트너가 유괴범으로 나오는 영화 <퍼펙트 월드>를 보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었는데, 그때 이후로 영화를 보고 운 건 정말 처음이었다. 2006년에는 <로제타>만이 아니라 다른 영화를 보다가도 눈물을 흘렸다. 부산국제영화제에 혼자 가서 요트경기장에 앉아서 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그렇다쳐도, <미치광이 피에로>를 혼자 보다가도 울었으니까.

운다는 게 대수인가. 그러나 나에게는 영화를 보다가 울었다는 건 참 큰 사건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내가 정말 감수성이 매마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어떤 예술작품을 보고 우는 것에 대해 엄청난 책임감을 느낀다. 그냥 펑펑 울어버리고 카타르시스나 묵힌 감정 같은 걸 쏟아내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감정 배설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무지하게 거리를 두고 영화를 보다가 이 영화에 나를 맡길만하다고 여겨지면 그것에 빠져버린다. <로제타>는 그런 영화였고, 시련 속에 빠져있는 나를 구제해준 영화이기도 하다. 나는 영화의 주인공인 로제타가 드러내는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뚫어지게 응시한다. 그녀가 친구의 집에서 잠에 들며 혼자 중얼거리는 장면은 도리어 치장처럼 느껴지고, 소리없는 행위들과 겉 포장지 같은 표현들만이 진심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로제타의 속마음에 반하는 거짓말들과 거짓 행동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의식이 드러난다. 무의식은 거짓을 말하지만 거짓말에는 진실이 있다는 명제를 떠오르게 한다. 그런 표면들에서 무의식의 층위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궁극적인 무의식성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많이 에둘러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무쉐뜨>는 <로제타>에서 생긴 의문의 답을 구할 수 있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그 형언키 어려운 극적/미학적 순간이 바로 <무쉐뜨>에도 존재한다. 오히려 <무쉐뜨>에서 그것이 하나의 본류 내지 원초처럼 느껴지며, 완전히 단순화되고 형식주의적인 본체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이 영화는 아마 그런 순간을 지니고 있는 ‘뜨거운 영화들’의 영원한 시조처럼 존재할 것이다. 열네살의 소녀 무셰뜨는 병이 들어 죽어가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있고, 또 쓰레기 같은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오빠도 있는데 그들을 모두 돌봐야 하는 존재이다. 거의 하나의 인간을 삶의 극단으로 몰아가기 직전의 설정이다. 학교에서도 마을 공동체에서도 버림받은 그녀는 홀로 숲을 헤매다가 어느 오두막집 같은 곳에 다다르는데, 따라온 그 남자는 이 냉정하고 어린 소녀를 겁탈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무셰뜨는 그 남자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의미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이해의 단초들은 모두 제거되어있고, 오직 행위들만 있으며, 거짓말과 가려진 표정만 존재한다. 사람들의 시선은 멀게만 느껴진다. 이 불쌍한 소녀는 공동체나 세계, 문명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마지막에 그녀는 호수에 빠져 죽음을 택한다. 그것이 마치 하나의 사랑의 실천인 것처럼 아무 변이나 응답도 없이, 행위 그 자체로서만 말이다. <무셰뜨>는 행위로서만 존재하다가 행위로서만 죽음을 통고한 소녀에 대한 영화이다. 나의 말 많고 변명 많은 삶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자기 삶 앞에 당도한 비극에 응대하는 가장 혁명적인 태도가 바로 무셰뜨의 태도가 아닐까.

오늘날에는 수많은 로제타들이 사회적인 사건들의 존재로서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그걸 맞이하는, 혹은 맞닥뜨리는 우리들의 태도는 아직(혹은, 불행하게도 결국...) 혁명적이지 않다(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무셰뜨>를 세 번 본 이후로는 <로제타>가 전혀 감동적이지 않게 되었다. 도리어 ‘본류’이자 ‘시조’인 그것을 보니, <로제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시무시하다, 브레송은. 참고로 이 영화는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 <무셰트의 새로운 이야기(Nouvelle histoire de Mouchette)>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포스팅하다가 이미지들을 좀 찾았는데, 처음으로 브레송이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꼬장꼬장하고 바싹 마른 노인네 같을 것만 같은 그의 인상은 의외로 정반대였고, 오히려 약간 롤랑 바르트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