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이 글은 2012년 5월에 인쇄 발행된 <얼룩진> 2호에 실린 글이다. <얼룩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돌곶이포럼이 만들었던 무크 독립잡지였다. 2014년경까지 그것은 5호까지 발행됐고, 이후에는 정체 상태를 겪었다.


“내가 처음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가 뭐였지?” 만족스럽지 못한 워크샵 결과를 돌아보니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이리저리 먹고사는 문제에 치어 살다보니 어느 순간 내가 찍고 싶은 영화가 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요컨대 이 글은 어떤 위대한 감독들이 으레 그러하듯 “나는 이리하여 영화를 하게 되었다”는 식의 낭만적 위안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은 비로소 내가 영화학교의 졸업에 직면하고 나서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식의 지름이나 번민의 응집에 가깝다.

엉뚱하게도 경영학 전공으로 대학에 다니던 24살 즈음 어떤 복잡다기한 계기들로 인해 오랫동안 품었던 영화만들기의 꿈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이 세상의 표면 아래에 잠겨있는 목소리들이 너무 안타깝고 서글펐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제 몸에 불을 지르며 자기 삶의 문제를 알리지만 주류 미디어와 권력에 의해 잠식된 세상은 인간을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것은 분명 우리 모두의 삶을 정신적․물리적으로 파괴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였다. 그러나 점점 세상은 이런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길 꺼려했다. 그것은 무언가 촌스럽고 껄끄러운 ‘튀는 행동’ 쯤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주류적인 질서에서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어쩌면 나도 저 질서에 포섭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이 우리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드높은 현실의 장벽은 우리 자신을 점점 더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2006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편의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대학을 떠나 어느 보험회사에서 잡일을 하고 있었다.)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았다. 3천여명의 사람들이 숨 죽여 그 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위대한 리얼리스트 영화감독의 작품을 보았고, 나는 수영만의 바닷바람과 차가운 가을의 공기, 그리고 알 수 없는 밤의 기운이 천정처럼 뒤덮은 무형의 영화관에서 20세기초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을 응시하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영화가 끝나고도 절대로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로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적어도 저 서글프고 참혹한 마음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를 들면 왜 2003년 가을 노동자들이 그렇게 서글프게 죽어가야 했는지, 왜 뉴스에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거나 오도된 사실만 흘러나오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영화는 남포동에서 본 <미치광이 피에로>였다. 그때까지 장 뤽 고다르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던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그의 영화들에 매료되고 말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깊숙이 빠져들었고 마지막의 다이너마이트 폭파 씬에선 형언할 수 없는 슬픔마저 느꼈다. 그 기괴한 비극이 왜 그때의 나에게 그런 해방감을 주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당시의 복잡한 마음과 슬픔에 대해 위로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나는 다시 이 상극의 두 영화를 떠올리고 있다. 하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무엇,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스스로 위로받은 무엇. 그래서 고독감과 자기혐오에 빠진 다른 사람들도 이 영화로부터 ‘정신적 해방’을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데 나는, 훌륭한 영화가 주는 어떤 위안과 해방감을 알게 된 나는, 어쩐지 이런 마음과 접근의 권리를 독점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CINEMA'로서의 영화의 본질이 작동되기 위해 영화는 항상 ’대중영화‘, 즉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져야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거의 상영되지 않는다. 요컨대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상상하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배급하고, 비로소 관객들에게 상영되는 그 순간에 완료되는 것인데 어떤 영화들은 미처 상영되지도 못하고 자기 생명을 마치고 마는 것이었다. 상영된다고 하더라도 거의 미미하고 의미 없는 수준에서 그치고 만다. 그런 영화들이 멀티플렉스 팝콘과 함께 쥐어지는 티켓이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매판자본가들에게 ‘상품성이 없는 것’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으로 ‘대안적 영화들’은 항상 드물게 만들어져(제작-배급-상영) 왔다.

물론 70년대의 고다르는 지가 베르토프적 영화미학을 추구하는 그 시기의 새로운 영화들을 다른 누구보다도 노동자계급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노동자들에게 그 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공장이나 여러 일터에서 자기 영화의 순회상영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것을 본 노동자들의 반응은 냉담하기 이를데 없었다. 너무 난해하고,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다르(할아버지ㅠ)가 당도한 미학적 과제는 바로 그곳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된 이유가 영화에게 존재했던 두 개의 역사 중 하나가 사라져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기에 오늘날 그의 과제는 잃어버린 ‘필름 소셜리즘’ 역사를 구제하는 것이 된다. 물론 그것이 과연 성공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런 고민을 품을 때조차도 한국이라는 피폐화된 영화판에서 이런 ‘사치스런' 고민을 하는게 가당키나 한 것인지 의심하기도 한다. 당장 ‘새로운’ 영화라는 것을 만들 수 있는 조건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디지털시네마의 출현에 대해 평론가들이 갑론을박을 거듭하던 시기가 있었다. 한편에서는 이 새로운 기술복제시대에 대한 찬양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술을 악마처럼 여기는 온갖 우려들이 있었고, 영화과 신입생들이었던 우리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들이 분분했었던 것 같다. 어쨌건 ‘디지털’의 시대는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불비한 시대에 ‘뒤늦게’, 시차적 간극을 드러내며 도래했다. 그러니까 디지털이라는 형식이 그간 영화를 찍을 수 없었던 ‘몫 없는 자들’에게 어떤 ‘무기’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아예 판가름조차 할 수 없는 반동의 시대가 되었고, 디지털 영화는 혁명이고 투쟁이고 파업이고 하는 것들이 전면적이고 냉소적으로 부정되던 그 즈음에 등장한 것이다.

나는 디지털 영화가 인류에게 어떤 엄청난 호혜를 안겨줄지 판단할 수 있는 지적 깜냥이 없었지만, 어쨌든 돈이 없는 나에겐 꽤나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기이하게도 비평이나 창작 모두에게 있어서 그런 영화들을 알아보고 격찬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나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람들은 독립영화나 아방가르드한 형식을 띤 어떤 영화들을 볼 기회를 갖기도 힘들뿐더러 구태여 시간과 돈을 투자해 그것을 볼 의향도 별로 없다. 게다가 한국영화 배급시장의 절대치를 장악한 배급시장 대자본이 그런 영화들을 배급할리 만무하다. 또한 관객대중 자신도 시장의 취향에 어떤 동일시를 갖게 된 지 오래다.

이런 상황은 점점 더 관객들의 감각을 ‘영화적인 것’이라는 것과는 멀게 후퇴시킬 것이다. 어쩌면 이제 누구도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메시아는 지금-여기에 이미 와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 뿐”이라는 벤야민의 말처럼 말이다. “이제 우리가 알던 영화라는 건 없고, 우리는 그냥 대기업에서 돈을 받아서 동영상 콘텐츠 같은걸 맞춤생산하는 그런 사람들인 거지 뭐.”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 털어놓았다는 이 말은 단지 푸념에 불과하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하기에 우리는 다시 그런 영화들을 만들고, 또 상영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대안 제작/배급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한 이유다.

더군다나 나는, 최근 국내 몇 개의 영화관에서 개봉해 소수의 사람들에게 선택된 <자전거를 탄 소년> 같은 작품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그들 자신’에게 상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전거를 탄 어떤 가난한 소년 자신, 혹은 그런 어린 시절을 겪었던 어른들, 그리고 자전거를 탄 소년을 버린 아버지 자신에게 말이다. 그러나 그들 다수는 아마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또 개봉했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배급자본이 아주 제한적으로만 이런 영화가 배급선상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에서 누군가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나 미카엘 하네케의 <늑대의 시간> 같은 지극히 동시대적이면서 급진적 영화 미학을 구사하는 작품들을 만들고자 했을 때, 그들은 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자본을 모을 수 있었을까?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예술영화를 위한 지원시스템이 구축된 유럽의 몇몇 나라들을 제외하곤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배급에 있어서 이런 영화들은 상영될 기회마저 얻지 못한다. 서울의 몇몇 예술영화관에서 상영되는 게 전부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좋은 영화들을 볼 기회도 거의 갖지 못하는 것이다.

더 아이러니한 문제는 900만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그 가족들, 저 많은 아르바이트생․계약직 노동의 청년들에게 더 많이 다가가야 하는 <더 차일드> 같은 작품들이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만 향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든 싫든 ‘씨네필’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영화 애호가들 말이다. 오히려 다르덴 형제가 진정으로 자신의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노동자계급에게 9000원짜리 예술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저 무명의 영화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서만 존재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는 대안적 제작․배급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는 정책적․제도적으로 다수의 소규모 제작시스템을 지원하고, 뜻있는 민간자본은 몇몇 대형 투기자본과 함께 맞물려가는 상품적 성격이 강한 기획영화보다는 ‘새로운 영화들’에 투자될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배급에 있어서도 보다 많은 장이 열려야만 한다. 솔직히 나는 멀티플렉스 따위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팝콘 냄새가 진동하고 시장 질서에 획일적 취향을 기입하려는 멀티플렉스 체계는 저런 독립영화들을 상영하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 영화가 5개관씩 상영관을 잠식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영화라는 예술 자신에게 쥐약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우리는 90년대 중후반 이후 멀티플렉스가 장악한 한국의 배급시장에서 단번에 일대 변혁을 꾀하긴 어렵다. 그러나 나는 멀티플렉스가 부디 사라져주길 바라는 이 오래된 꿈을 애써 포기하고 싶진 않다. 마치 우리가 모든 대학과 도서관들이 공공의 것이 되길 바라는 것처럼 영화관에 대해서도 그것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볼 순 있을 것이다.

일단 우리는 공장에서, 학교에서, 마을 한복판에서, 동네 주민센터에서, 구립 문화센터에서라도 좋은 영화들이 그 영화가 만나야하는 대상들 자신에게 상영될 수 있도록 ‘대안적인 배급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배급구조 속에서 좀 더 활발하게 좋은 영화들, 대안적인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제작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스크린’을 뒤흔드는 구조적인 개혁은 전체 사회운동과 함께 맞물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는 한미FTA 같은 자유무역 흐름이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저항들이 될 것이다. 다양한 사회운동적 목소리들과의 교감 속에서만 문화판, 영화판의 일대 변혁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작은 영화를 만들고, 더디더라도 보다 다양한 공간에서 ‘다른 영화들’이 상영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을 벌여나가야 한다. 이제까지와 같이 제작자들과 영화 노동자들이 영화를 만들고 나면 배급업자가 알아서 배급해주기를 바라는 기존의 시스템에 기대기만 할 수는 없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영화가 의미-발화할 수 있는 순간까지 그것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면, 대체 어떤 구조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지 인식해야 한다. 어쩌면 이런 대안적 배급과 상영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우리 학교의 트랜스키노나 동아리회관의 영감다방, 석관동 주민센터나 근처의 카페나 심지어 미싱공장 같은 공간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자기 방에서 빛을 차단하고 30인치 모니터를 응시하는 외로운 관객이 되기를 자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앞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새로운 네트워크망이 그러한 대안적 배급시스템의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구축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유효하다. 더불어 영화과나 영상이론과에서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을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획 수업들이 만들어지길 희망한다. “그런 영화를 만든다고 누가 보겠니?”라며 냉소적인 핀잔을 던져주는 것보다 “이런 영화들이 관객들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라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친구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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