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트뤼포의 <부드러운 살결>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를 거의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처음 보았다. 요즘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마이티 아프로디테"라는 주제로 시네바캉스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이 중 트뤼포의 영화들도 몇 개 상영되고 있다. <마지막 지하철>, <이웃집 여인>, 그리고 이 영화 <부드러운 살결>. 앞의 두 영화는 80년대
연극 『작은새』 어제 학교 상자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볼 수 있었는데 보지 못해서 아쉽긴하지만. <방해자들> 색보정을 끝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방해자들>은 마지막 두 씬을 해 기울어서 마구잡이로 찍은 것 치고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공부가 된 습작 경험이었다. 아무튼 대학로에서 일주일만에 또 연극 공연을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 <빨간 풍선>을 다시 봤다. 볼때마다 좋지만 어제는 더 좋았다. 볼때마다 새로운 겹을 만나게 되고, 볼때마다 다른 세계가 느껴진다. 이런 영화는 많지 않다. <빨간 풍선>, <아워뮤직>, <미치광이 피에로>, 음... 좋은 영화는 많지만 볼때마다 새로운 영화는 얼마 없다. 어제 네번째 봤는데, 어제는 줄리엣
꼰대의 정의 우석훈씨의 “청년유니온, 우리가 후원자가 됩시다”라는 글을 읽고 몇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 글에서 그는 “꼰대의 정의”를 논하며 청년유니온의 후원회원이 되자고 제 꼰대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20대로서, 우리 세대의 자립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던 나는, 그의 지속적인 개입에 대해 일정한 불만을 갖고 있다. 그 불편하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오시마 나기사의 <교사형> | 바깥이 없는 국가 <교사형>을 봤다. 굉장히 복잡하고 관념적인 영화이다. 보통 영화에 대해서 규정할때 "저 영화 너무 관념적이야."라고 말하면 영화를 '영화'다운 것이 아닌, 어떤 이론적인 틀에 끼워맞추어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식으로 비평하는, 어느 정도 부정적인 뜻으로 쓰는 것인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오시마 나기사의 <백주의 살인마> 지금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일본의 거장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이 하고 있다. 얼마전 나는 <사랑과 희망의 거리>와 <윤복이의 일기>라는 두 전기작과 <고하토>와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라는 두 후기작을 보았는데, 오늘은 1966년작 <백주의 살인마 白昼の通り魔>를 보았다. 이 작품도 전기작 대열에 속하는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크리스마스> 역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이번달 28일까지 열리고 있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중 본 작품이다. 어제는 매표일을 끝내고 정산을 마치고 바로 들어갔는데, 앞의 30분은 보지 못하고 뒷부분의 90분만 보았다. 그래서 확실히 제대로 말하기 어렵지만, 몇가지 놀라운 지점이 있었다. 우선 출연한 배우들 면면이 놀라웠다. 일단 하라 중사 역으로 기타노 다케시가 등장하고, 또 일본군 대위로
이만희의 <삼포 가는 길>, 떠나가는 연인을 바라보는 카메라 학교 도서관에서 <삼포가는 길> DVD를 보았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본 작품이고, DVD로 제작된 것들 중엔 유일하게 도서관에 있었다. 이 좋은 영화를 왜 여지껏 못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조차도 사실은 한국의 옛날 영화들에 대해서 일정한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연호 선생님으로부터 DVD를 선물받아서 본 <하녀>
공부하는 바보, 공부하지 않는 바보 "왜 불란서 사람들은 꼭 스테이크하고 와인을 같이 먹느냐? 우리는 그거를 마치 원래 프랑스 사람들은 그렇다, 라고 얘기가 되고 있지만 롤랑 바르트가 그 소위 식사 행위라든지 아니면 특히 모드 분석을 하면서 왜 우리가 블라우스를 입고, 뭐를 입고, 이렇게 입느냐? 그리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느냐?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의 철저하게 말하자면 그냥
영화 <더 로드> 작년 봄에, 아직 내가 상병을 갓 달았을때, 군대에서 이 원작 소설의 원서와 번역서를 모두 본 적 있다.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궁금했었다. 같은 작가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그런 경로를 거쳤는데, 소설이 노리는 지점과 영화가 노리는 지점은 절묘하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고 느꼈었다. 확실히 영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