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어린 시절

사진이라는 것이 탄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세기 중엽. 스코틀랜드 사진작가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David Octavius Hill)은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겼다. 아래 사진에서 남자 둘은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아마 옥타비우스 힐이 내내 스코틀랜드의 교회 공동체라는 범주 안에서 작업을 했으니 둘은 아마도 교회 공동체에 속한 주요한 인물들일 것이다.

역시 David Octavius Hill의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이다. 이처럼 그의 사진 속 여성들은 남성들과는 다르게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며, 어딘가 안절부절하지 못하는듯, 불안하게 아래쪽을 사선으로 응시하고 있다. 또 손 역시 어딘가 어색하다. 카메라의 응시 자체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당시 가부장적 스코틀랜드 기독교 공동체에서 여성이 처한 사회적 위치를 드러나게 하기도 한다.

여기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 발터 벤야민이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이나 으젠 앗제의 초창기 사진작가들의 사진에 대해 국한시켜 '사진'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오직 그때에, 그러니까 도리어 사진 기술이 아직 거의 발달되지 않아서 사진 찍기가 참으로 고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었고 사람들에게 여전히 낯설었던 그 초창기의 사진에, 기술사의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벤야민에게 모든 역사는 그것의 '초창기'에 혁명적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곧 사라지고 바로 퇴락하고 쇠퇴하게 되는데, 자본주의 역사에서 그것은 곧 '대중화'의 시기와 일치한다. 어쨌든 저 사진들에서 감지되는 욕망들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저 퇴색된 사진이 '붙잡아둔' 저 제스추어, 여성과 남성의 제스추어 속에 '미래'가 담겨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언급되는 것이 카프카의 어린 시절 사진이다. 위 사진은 이런 저런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사진사에 의해 찍힌 프란츠 카프카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다. 벤야민은 어린 카프카의 저 표정, 몸짓, 제스추어에서 카프카의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당시 사진은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쁘띠 부르주아들의 대중적 취향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러면서 대단히 성행했던 것이 '스튜디오 사진'이다. 그 스튜디오에는 여러 이국적인 풍경들이 무대 장치로서, 미술적 장치로서 장식되었는데, 카프카에서 찍은 사진에서도 그런 이국적 풍경을 볼 수 있다. 저 뒤의 '가짜' 망아지, 그리고 그 위와 뒤의 장식들.

이것도 비슷한 느낌인데 이 사진에서도 역시 어린 카프카의 '음울함'이 느껴진다, 고 하면 오버인가? 그런 감상을 지울 수 없다. 고독한 응시 같은 것. 벤야민이 말하는 이국적 풍경으로 그득한 스튜디오의 모습도 보여진다. 저 지팡이, 모자, 그리고 꼭 끼는 옷도 당시 스튜디오 사진을 찍을때, 이국적 풍경과 그 이국적 세계를 모험하고자 하는 당시 쁘띠 부르주아들의 욕망을 '재현'하기 위해사용되는 소품들이라고 한다. 어린 카프카의 눈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데, 벤야민은 저 시선에 대해 "슬프고 깊은, 고독한 시선"이라고 말하고, 저 모습이 마치, 거짓으로 꾸며내서 재현해내려고 하는 당시의 세계의 거짓됨과 충돌하고 있다고 말한다. 저 사진에 아우라가 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이다.
"그래, 순수한 아이야. 너는 그랬어. 실제로 너는 진정으로 악마같은 사람이었지!"
카프카의 <선고 Das Urteil>를 보면, 아버지가 위와 같이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러니까 잘 들어라! 알겠느냐, 나는 너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익사형을!" <선고>에서, 약혼 후 곧 결혼할 예정이었던 게오르그는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나서 옆방에 있는 아버지에게 그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와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사실 자신의 친구와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이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게 익사로 인한 사형 선고를 내린다. 게오르그는 강물 속으로 뛰어내린다.

위 사진은 카프카가 두 살이었을 때의 모습이다. 그는 30년 쯤 후에 이 사진을 그의 약혼녀인 펠리스 바우어에게 보내며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아마도 다섯 살 때 즈음 찍은 내 사진을 동봉할게요. 당시에는 화난 표정을 장난삼아 짓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비밀스러운 진실이었다고 생각해요… 이 사진에서 저는 진짜 다섯 살이 아니라, 두 살에 가까웠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을 좋아하는 이들이 저 자신보다 더 잘 판단할 거예요. 저는 아이들이 주변에 있을 때 눈을 감고 있는 것을 선호했죠."

그리고 위 사진은 카프카가 좀 더 자랐을때 누이들과 찍은 사진이다. 저 머리, 구두, 복장. 카메라의 정면보다는 좀 더 왼쪽을 향해 있는 저 퀭한 눈의 시선이 눈에 띈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너무 자신이 없었고, 내가 확신하는 것은 이미 내 손이나 입에 쥐고 있는 것,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길에 무엇이 잘 되어 있는지 뿐이었어요."
"다른 모든 것들을 유발하는 두 개의 원죄가 있다면 바로 조급함과 게으름입니다."

13살 때 카프카는 유대교식 성인식(Bar mitzvah)을 치러야 했다. 어린 유대인 소년들에게는 인생의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다. 유대인들의 경전인 <토라>를 읽으면서 진행되는 이 의식은 소년이 '성숙'해 '유대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됐음을 상징하는 제의같은 것이다. 이 의식를 거치고나면 소년들에겐 여러가지 의무가 생기는데, 어린 카프카에게 그것은 엄청난 억압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내가 말하는 대로 쓰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지 않고, 생각해야 할 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마 내 글은 가장 깊은 어둠에서 나올 것입니다."

어두운 청소년기를 거쳐 18살이 되던 해, 카프카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 세대는 잃어버린 세대일지 모르지만, 아마도 이전 세대보다는 잘못이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