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마지막 날

예전엔 항상 이맘때 해를 맞이하면서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과 "새해 복 많이 쟁취해. 복이란 거져 생기는게 아니라 투쟁해서 쟁취하는 것이어야 진짜 복이니까"라고 오글거리는 운동권 덕담을 주고 받았는데 6년만에 다시 들으니 참 생경하다. 생각해보면 복이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각자도생 약육강식의 시대에 제각각 싸워 쟁취하는 복일랑 승자독식의 복일테니 말이다. 그래서 묵주나 십자가를 앞에 두고 우리 아들 명문대 가게 해주세요, 우리 딸 승진하게 해주세요, 고시 합격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복'하는 것이 참 싫었고, 씨니컬하게 느꼈다. 진짜 기도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한 평화를", 이라든지, "우리가 이런 약육강생하는 질서가 아닌 대안 세계의 질서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세요" 이래야 하는거 아닐까.

몫 없는 자들이 웃을 수 있는 일들이 많아져야 진짜 <복>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런 꿈일랑 사라진 시대라서 그런가? 이제 아무도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정치인들의 복을 기도하고 좌파들은 좌파들만의 복을 기도하고 우파들은 반국가반공세력 척결의 꿈을 꾸고 자본가들은 이윤 증식의 꿈을 꾸고… 우리들은 아무 꿈도 없다.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들, 아니 종교를 갖지 않아도 새해 언저리가 되면 소원을 빌고 꿈을 품는 모든 사람들이 '몫 없는 자들' 공동의 꿈을 갖거나 기도하거나 혹은 다짐하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2년은 너무 좋지 않았다. 어차피 달력 한 장 넘기는 것뿐이지만 이렇게라도 다 떨치고 새해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몸이 안 좋아 어제 저녁에 잠들었다가 자정에 깨어났다.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잠을 자고 싶지 않다. 이대로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얼마전에 <호빗>을 봤는데 '모험'이라는 테제가 부여하는 모호한 에너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난쟁이들에겐 그 여정이 고향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인데 유일한 호빗족 참가자 빌보 베긴스는 그냥 마냥 '모험'이다. 이 목숨을 건 모험을 갈 것이냐 말 것이냐… 고뇌 끝에 내린 결정은 "호빗은 모험을 좋아"하니까 그냥 가는 것이다. 이 얼마나 귀엽고 깜찍한 레토릭인가.

'모험'을 주제로 하는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선 빈껍데기 꿈도 엄청난 레토릭으로 설명하고 열렬하게 피력한다. 장엄한 음향효과와 CG효과, 드라마틱하게 배치된 크고 작은 위기들, 목표를 쟁취하기 위한 몸부림들, 내레이터 윤도현의 오버액션까지. 이 레토릭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헌데 착취와 억압으로 이루어진 모순 덩어리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 폭주하는 기관차를 멈추기 위한 싸움도 하나의 모험이라면 모험이다. 더군다나 희망도 성찰도 사라진 시대라면 더더욱 그렇다. 때로는 이 모험에 환상적인 제스추어도 필요한 법이다. 이게 비과학적인 논리인지 모르겠지만 꿈이란 어떤 강력한 '매혹'이 있어야 하고, 자본주의라는 폭주 기관차를 멈추게 하는 이 '운동'에 매혹도 꿈도 사라진지 오래라면 여기에 그런 수사들, 무늬를 갖다 붙이는 일도 필요한 법이다. 그게 레토릭일수도 있고, 시나 문학, 낭독의 제스추어, 미술이나 영화일수도 있지만 지금 그런 것이 존재하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영화 <호빗>은 레토릭일뿐일지언정 그런 장치들이 가득해서 볼만했다. <레 미제라블>은 그게 너무 엉성해서 지리멸렬했다. 마지막 시퀀스는 참 멋지지만 마지막 떼창이 죽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시체더미 위에서 거행된 부르주아 커플의 결혼식 축가 같았다. 그게 낭만주의 문학의 한계겠지만 지금 필요한 매혹이 그런 풍경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저 사기꾼 거지 가족의 딸이 사랑을 쟁취해 남자와 함께 바리케이트 너머로 걸어가고 장발장의 딸은 양아버지 장발장과 결혼했더라면…? 아마 그랬다면 낭만주의도 휴머니즘도 아니겠지… 새해 복에 대해 쓰다가 갑자기 영화 스포일러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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