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500일의 썸머』

1월 28일, 오후. 신촌 아트레온에서 <500일의 썸머>를 보았다. FOX Searchlight에서 내놓은 소규모영화이고, 항상 그랬듯 소박하고 담담하게 라인업의 기조를 지키는 영화. Mark Webb이라는 신인감독이 연출했고, 조셉 고든-레빗(좌)과 조이 데 샤넬(우)이 주연을 맡았다. 그러나 거의 조셉 고든-레빗이 맡은 '톰'이 주인공인 영화이다. 톰이 운명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썸머'와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짝사랑 끝에 진지한 관계가 되고, 다시 헤어지고 그녀를 잊어가는 과정 그 자체에 대한 영화랄까. 아주아주 오랜만에 보는 로맨스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았고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이 영화 역시 멜로 영화가 흔히 묻는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사랑이란 뭘까? 그리고 연애란? 운명적인 사랑이란 존재하는 걸까? 주인공 톰은 그런 질문 앞에 항상 '그렇다'고 대답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썸머를 처음보고 사랑에 빠지는 건 마치 그녀가 운명의 여인이라고 믿게끔 만든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항상 즐겁고 뜨거웠으며, 또 격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거의 모든 연애가 그렇듯, 상대자인 썸머에겐 이런 감정이 조금 덜 하다. 그녀는 어딘가 알 수 없는 데가 있는 여인이다. 진지한 관계는 싫다고 말하며, 우린 그냥 좋은 친구이어야 함을 각인시킨다. 사랑이 존재하리라는 건 믿지만, 당장은 아니며, 그런 관계는 자기 삶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싫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톰보다는 도리어, 썸머에게 감정이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분명, 톰에게 감정이입을 해야하는 영화이지만, 톰에게는 아주 가끔만 그랬을뿐 이입되기 어려운 감정선이 있었다. 사랑에 관한 수수께끼에서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일까? 영화가 후반부가 이어지면서 둘의 관계는 깨어지고, 톰은 점점 정신적 공황상태로 치닫는다. 그가 실연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를 다시 되찾는 것 밖에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일반적인 대중영화에 익숙한 관객으로서는 과연 언제, 그녀 썸머가, 톰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라는걸 깨닫고 돌아와 둘이 다시 뜨겁게 맺어질까, 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얄팍한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영화이다. 둘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중에, 톰이 그녀를 거의 모두 잊을때즈음 둘은 항상 같이 가던 공원 잔디밭 위에서 다시 만난다. 어이없게도 썸머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 이후이다. 톰은 마냥 그녀를 축하할 수는 없음을 솔직하게 밝히며 그녀에게 묻는다. 왜 몇달전 누군가의 결혼 피로연에서 만났을때 자기와 춤을 추었냐고. 그 춤이 그를 잔인하게 고문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단지 그렇게 하고싶었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녀는, 예전에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던 그 운명의 사랑, 그것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다른 남자에게서 말이다. 그 고백으로서, 썸머는, "우리는 아니였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톰은 도리어, 자신은 오히려 예전에 네(썸머)가 했던 말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운명적인 사랑같은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러자 썸머의 말, "아니야. 운명의 사랑은 존재해. 단지 내가 그 운명이 아닐 뿐이야. 언젠가 네게도 올꺼야."라고.
썸머의 그 말은 예언처럼 현실로 닥쳐온다. 바로 그 마지막 순간이, 이 영화의 진정한 타협이자 관객의 기대와의 화해의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이 영화가 견지하던 리얼리즘도 깨어진다. 멜로영화의 공식을 완전히 깨지는 않은 채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과 연애에 대해서 말하는 것. 헐리우드 로맨틱멜로영화가 취한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