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가 (영화라는) 아이를 낳았는데, 무대 위에 세워야 하는 거죠. 어떤 부모는 아이에게 예쁜 옷도 입히고, 말투도 교정시키고, 사람들이 귀여워할 만한 행동도 가르쳐요. 저는 아이가 그냥 속 편하게 크길 바라니까, 밖에서 놀다가 올라가서 그냥 네가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고 내려오라고 그러고요. 그러면 관객들은, 말도 잘하고 귀여움도 잘 떠는 아이를 더 좋아할 수도 있겠죠. 제 아이를 보면서는 ‘쟤 너무 준비를 안 한 것 같아. 부모가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야?’ 그럴 수도 있는 거고요.(웃음) 하지만 저는 그 아이가 스스로 크게 맡겨놓는다는 거죠. 그런 차이가 조금 있는 것 같아요.”

영화감독 홍상수 인터뷰 中

홍상수의 아홉번째 장편영화이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숏숏숏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어 상영한 단편<첩첩산중>까지 치자면 열번째 개봉영화이다. 작년 2월 개봉한 <밤과 낮>을 통해 칸느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던 그는 이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로도 비평가주간으로 초청되었다. 이토록 홍상수라는 '작가'는 고전하는 흥행실적과 점점 열악해지는 제작여건 속에서도 홀로 독야청청 빛나고 있으며, 작품세계의 폭은 더 좁혀가면서도 홍상수만이 할 수 있으며, 홍상수만이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년 남성'의 인생살이. 386지식인의 자기모순과 부조리의 세계를 비교적 심각하게 다루던 그는, <해변의 여인>에 다다르면서 익살과 유머의 세계로 완전히 인입하더니, 이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차라리 코미디 영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귀여운 유머들을 계속해서 쏟아낸다. 그것은 감독 자신을 투영한 '영화감독' 구경남의 인생살이 자체를 노골화시킴으로써 드러나는 유머의 코드가 약속된 상태에서 쉴새없이 흘러나오는 캐릭터화된 유머의 세계이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제천과 제주. 1부와 2부라고 해도 좋으리라. 구경남이 두 곳에 간 이유는 각각 다르나 구경남은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찾았다가 제천에서 겪은 일들을, 제주영상위원회 특강 강사로 찾은 제주에서도 반복 경험한다. 일종의 수미쌍관의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홍상수는 이처럼 두번 반복되는 경험들을 영화 안에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반복의 경험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방식으로 직조한 구조적인 틀은 그가 추구하는 서사적 미니멀리즘의 색깔을 보다 더 홍상수적인 것으로, 그리고 더 풍부하고 깊이있는 것으로 만드는데 힘을 보탠다. 홍상수의 세계에서 인생이란 아주 약간씩의 뉘앙스들과 대상 인물들만 바뀔뿐 같은 행위와 결과는 반복-배치된다. 그 안에서 캐릭터들은 분투하며 반복성의 삶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인생, 인간이란 그리 쉽게 변화되지 않는것. 더군다나 제 잘난 맛에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중년 남자아닌가. 홍상수는 여전히 갈등하고 고뇌하지만 관객이 보기엔 엉뚱하고 코믹하기만 한 캐릭터를 더 풍부하고 대중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자신이 살면서 깨닫는 도가적 진리들을 넋두리 쏟아내듯 풀어놓는다. 마지막에 고현정과 나란히 앉아서 제법 카타르시스적인 깨달음의 정서를 쏟으며 마무리하는 건 <해변의 여인>의 끝과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나는 특히, 홍상수가 그 어떤 감독보다 제 영화를 보아주는 관객을 아끼고 사랑하며 영화의 주인처럼 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홍상수는 그가 <해변의 여인>이나 <극장전>, <생활의 발견> 등에서 그러했듯 관객에게 돌리는 이야기들을 서사와 대화 안에 맘껏 풀어놓는다. 특히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는 그 피드백의 분량이 실로 방대하다. 자신의 영화를 제발, 제발, 제발 이렇게 생각해달라는 이야기를 영화라는 자신이 지닌 최고의 언어로 맘껏 풀어놓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영화감독이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넬때 할 수 있는 가장 지적이며 신사적인 대화가 아닐까 싶다. 이런 식의 응답과 질문이 홍상수 영화에서만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미 그의 영화에서는 영화와 극장의 경계 안팎을 넘나드는 '대화-언어' 자체가 하나의 룰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8000만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제작한 영화이다. 독립영화수준의 예산이다. 카메라도 작년도에 새로 나온 것이라하지만 SONY EX1이라는 HD급 카메라 중에서도 준전문가급에 속하는 중저가 디지털 카메라이고, 촬영기간도 무척이나 짧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영화적 완성도를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8000만원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걸 유럽과 한국의 팬들에게 보여준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보다 험난한 재정고를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우복 넘치는 최고의 감독인 덕에 초호화 캐스팅 배우들의 노개런티 출연이라는 이점을 쥐고 있었고, 이런 말도 안되는 저예산으로 자유롭게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감독으로 자리잡게 해주었다. 여전히 어렵지만 그는 세계에서 가장 복받은 영화감독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밤과 낮>의 예산이 점점 줄어들어 9억으로 찍어야 하는 열악함까지 빠졌다고 영화계의 입들이 안타까워한게 어제같은데, 그는 보란듯이 1억으로도 영화를 찍는다. 물론 그 과정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영화 마지막에 고순 역의 고현정이 구경남(김태우 분)과 나란히 해변에 앉아 하는 충고는 여러가지로 이 영화의 세계를 무한히 확대시켜준다. 요컨대, 감독이 그 자신에게, 자신과 관계를 맺어온 수다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또는 자신의 영화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너무 그러지마요. 딱 아는만큼만 안다고 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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