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엔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 불확정적인 세계의 교착상태

코엔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 불확정적인 세계의 교착상태

연휴 전날 각색연습 수업 청강을 하러 학교에 갔다. 수업때 나의 <필경사 바틀비> 각색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들을 들었다. 어려운 작업이라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다. 내가 정말 이걸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가지각색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의 관념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는 부담감까지 겹쳐져서 계속 고민이 되었다. 재형이는 그걸 각색하려면 코엔 형제보다 잘 찍으면 정말 좋은 영화가 될텐데, 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코엔 형제만큼 찍지 못할거면 하지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괜찮은 충고였는데 너무 슬펐다. 내 생각에 이 세상에 코엔 형제만큼 찍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건 너무 비겁한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바틀비>를 각색해서 재밌는 단편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다. 고민이다.

술을 먹으면 안되는데 또 술을 먹었다. 자정즈음 겨우겨우 집에 돌아왔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속이 너무 좋지 않았다. 어지럼증이 너무 심했다. 그런데도 기어이 코엔 형제 영화를 찾아서 보았다. 내가 못 본 영화 중에 고르려니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밖에 찾을 수 없었다. 못 본게 몇 편 더 있는데 구하기가 힘들다.

역시 재미있는 영화였고 아주 잘 찍었다. 어떻게 보면 최근작인 <시리어스맨>과 상통하는 면도 있었다. 이 남자 역시 뭔가 그냥 조금 잘해보려고 하는데 그러면서 모든 상황이 얽히기 시작해 고난에 빠지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깊이 빠져들면서도 슬펐다.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불확정성의 원리가 정말 유일한 진리란 말인가. 영화가 말하는 바는 그 불확정성의 원리로 이루어진 세계, 그리고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 자신의 방황 상태이다. 여기에 어떤 도전, 억지, 시도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 원리는 또 다른 변주를 일으키며 꼬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확실히 코엔 형제가 현상학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닌지 묻고 싶다. 확실히 영화라는 매체는 현상학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코엔 형제에게 있어서 현상학적 성찰은 거의 진리 탐구의 도구에 가깝다. 거의 모든 영화마다 현상학의 '썰'들을 풀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불확정성의 논리의 자연과학적 뿌리라 할 수 있는 양자물리학은 현실을 모든 것의 '시원'으로서가 아니라 '진동의 연쇄'로서, 그러니까 오직 비실체화된 과정으로서만 묘사될 수 있는 존재로서만 설정한다. 어떤 입자의 '현상'(지각)은 현실 자체를 결정해버리므로 파동함수의 붕괴를 통한 양자 진동으로부터 '실제 현실'이 출현하는 것 자체가 관찰의 결과이며, 의식이 개입한 결과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의식은 잠재성과 다양한 선택 등의 영역이 아니다. 견고하고 특이한 현실과는 반대로 그 지각에 선행하는 현실은 유동적-다층적-개방적이며 의식적 지각이 이러한 유령 같은 선존재론적 다층성을 하나의 존재론적으로 완전하게 구성된 현실로 다시 환원시킨다. 여기에 '간극'이 존재한다. 실재와 현실의 간극이 대면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에드 크레인(빌리 밥 숀튼 분)도 이 실재와 현실의 간극 때문에 끊임없이 혼동에 빠진다. 계속해서 준거하는 존재들에 개입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괴리되고만다. 그래서 결국 영화가 거의 공포에 가깝게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해석(개입)하지 말라!"이다. 양자물리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해석의 위기 앞에서 둘 모두 해석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어떤 합리적 이론이나 이성적 관념을 현상적인 현실의 경험으로 옮기려고 하는 그 순간 우리는 무의미한 모순에 빠져버린다.

이 영화는 한계적이지도 단편적이지도 않다. 이 영화에서 에드가 처하게 되는 고난은 있는 그대로 우리 모두가 처한 교착상태를 보여준다. 그래서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에드처럼 영원히 '의미'를 생각하며 해석이나 개입을 행할때, 우리는 항상 삶의 모순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이건 현대의 거의 모든 훌륭한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고난의 양상이다. 그러나 에드가 보여주는 고난이 있는 그대로 모든 '실천'에 대한 부정을 뜻하진 않는다. 이 영화를 그렇게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가히 '에드스럽다'고 말하고 싶다. 차라리 우리는 에드는 오히려 실재적 삶과 가공된 삶 사이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 창조된 인물처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의미와 진리의 간극을 관념론과 유물론을 분리시키는 '극소 차이'로서 주목하는 것이다. 의미들의 망 바깥에서 진리의 차원을 식별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은 절묘하게도 <옥희의 영화>의 구조에서도 조우한다. <옥희의 영화> 속 네 편의 영화들 중 네번째 '옥희의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생각해보자. "배우 해주실 분은 최대한 원래 모델이 된 분과 비슷한 인상의 분을 선택했습니다. 그 비슷함이란 한계 때문에 제가 원래 보고 싶었던 붙여놓은 두 그림의 효과를 절감시킬 것 같습니다." 갑자기 말하는 자는 '옥희'가 되어버리고, '옥희'는 갑작스레 바깥으로 나와서 모든 것들의 '극소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게 영화의 '한계'에 대한 한탄일수도 있지만 이 한탄을 그냥 단순한 자조 섞인 한탄으로 들어선 곤란하다. 진리의 차원을 식별해내려는 고군분투의 노력으로 보는게 더 합당해보인다. 물론 확실히 그렇게 보도록 만들었기에 이 영화가 애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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