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와 『시대의 우울』

시인 최영미의 유럽여행기 <시대의 우울>을 읽다. 그녀는 한때를 떠들썩하게 하고,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상징적으로 알리는 토픽을 던졌던 장본인이었더랬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 말이다. 이 짧고 추상적인 문장은 말 그대로 한 시기의 화두가 되었다. 이것은 김지하가 91년 5월, 거리에 섰던 100만 대학생들을 향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조선일보' 기고를 통해 던진 철저히 선정적이기까지한 그것과 아주 나란히 서있었다. 우리는 이 시기의 서글픔과 격정을 알지 못한다. 그때 나는 말없고 수줍음많은 '국민'학교 2학년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서글픔과 격정은 온전히 유령처럼 살아남아서 내가 대학에 간 2003년까지도 좁디좁아진 학생회실과 몇몇 사회과학동아리의 동방(동아리방!) 안을 부유하고 있었다. 나는 그 유령을 맞닥뜨렸고, 대학 시절 내내 그 우울증에 걸린 유령을 떨쳐내지 못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새벽 5시반, 해가 느끼무섭게 학생회관을 마지막으로 나서던 그날, 그 유령의 실체를 본 것 같았다.

그런 내게 시인 최영미는 절대 열어보고싶지 않은 편지봉투같은 존재였다. 왜 있잖은가. 어린 시절의 부끄럽고 슬픈 과거를 나와 한 친구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친하고 마음까지 나누었던 친구하고는 오랜동안 연락도 하지 않는다. 숨기고싶은 비밀과 트라우마가 그 친구와 함께 공유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10여년만에 편지 하나를 보냈다. 하지만 그런 편지는 뜯어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꽁꽁 봉해놓고 감추고 있는 슬픈 과거가 그곳에 숨겨져있기 때문이다. 읽고나면 가슴이 쓰라려서 녹아버릴 것만 같은 이야기, 한 사람이 죽었고, 또 그때 슬퍼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시간이 지나 모두 잊어버린 채 가슴 속 저 멀리에 숨겨놓았던 이야기.

나는 책을 열었다. 전입한지 한달여가 지난 작년 7월초, 그 책은 부대의 도서관에 꽂혀있었다. <시대의 우울>이라니.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선언적이며 개척자적인 제목도 그 거창한 토픽의 무게에 짖눌려 정말 부담스러웠었는데 말이다. 이런 제목에는 자연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이런 제목이 달린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둘 중에 하나다. 비극적 이야기의 처절한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광장증 환자. 나는 책장을 펼쳤다. 그땐 벤야민의 몇몇 책들과 도서관에 꽂혀있던 이상문학상 작품집 몇권을 이미 다 읽고난 후였고, 아직 알라딘에서 주문한 책이 도착하지 않았을 때였다.

시인 최영미가 자신이 껶은 질풍같은 한 시기 끝에 홀연히 떠나보내고 싶은 것들을 정리하는 여행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주되게 유럽의 미술관들을 돌아다니며 만난 화가들, 그림들에 대한 감상들을 중심으로 여행을 이어갔는데, 그것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우울한 정서와 만나면서 일어나는 충돌들이 행간들 사이에 숨겨져있는 듯 했다. 그녀는 이제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책장을 덮으면서 그 자유로움에 부러움을 느꼈다. 나는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며, 악몽에 시달린다. 그리고 부끄러운 자책감에 시달린다. 이 유령과 영영 작별해야만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하지만 난 유령을 떠나보내지 못한다. 무거운 공기와 구름의 무게들이 다시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유령의 부활과 치유를 기원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 부활의 생명비의가 다가와 춤출 수 있게 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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