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토악물
이곳은 우리들의 마지막 요새로서 지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적들의 레이더망을 벗어난 곳에 있었음이 틀림없었으나,
불행히도 어떤 스파이에 의해서 우리의 위치는 발각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입구를 지킬 결사대를 꾸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십수명으로 꾸려진 수류탄 결사대가 바로 우리들이었다.
우리들은 겨우 수류탄 수십개만으로 입구로 향했다.
적들은 족히 수백, 아니 수천명에 달할 것이며
그들의 잔인함으로 말하자면 정말이지 끔찍하고 이루 상상할 수도 없는 정도라고 했다.
그들은 제 손에 달린 날카로운 가위 날로 뱃가죽을 제멋대로 잘라대는가 하면 산 채로 포로를 잡아 팔다리를 잘라버리거나 코나 귀를 잘라서 저들의 포획물 내지는 기념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구토가 나올 정도로 못생겼으며, 켄트 전설에 나오는 괴물들처럼 침을 질질 흘린다고 했다. 두려움에 가득찬 우리들은 눈물을 흘리며 입구로 향했다. 우리는 우리가 싸우다가 죽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나가야 했다. 싸우더라도, 싸우지 않고 항복하더라도 우리는 죽을 것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나는 결사대의 대장으로서,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아무리 죽음이 너무도 확실한 극악의 상황이라도, 저 괴물들을 최대한 죽이는 방향으로 우리의 전투 목표를 정하자고 말했다. 나는 저들이 모여들어 뭉쳐있는 지점 한가운데에 수류탄을 정확하게 투척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를땐 최대한 넓고 크며 길게 질러서 한 칼에 여러명을 죽일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하다가 구역질을 뱉고 말았는데 나도 모르게 발설된 나의 잔혹성이 나를 역겹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슬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우리들은 입구에 몰려 적들을 기다렸다. 잠시후 적들이 검은 파도처럼,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부엌 싱크대 안 깊숙한 구멍에서 흘러넘쳐 나오는 바퀴벌레떼처럼 쏟아져올때, 우리는 우왕좌왕 허둥지둥대며 적들과의 일대전투를 벌였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지옥같은 토악물에 온몸을 내던지는 것과 같았다. 전투라기 하기엔 너무도 역겨웠다. 나는 수류탄 수십개를 던지고 수십여개의 적들을 향해 난도질을 가했다. 그러나 적들은 계속해서, 끝없이, 밀려들어왔다. 밤새 계속된 전투끝에 한차례의 벌레들을 끝장냈다. 우리가 몸을 추스리고 전열을 가다듬어 토악물더미같은 시체 무덤에서 뒷걸음질을 치며 빠져나왔을때, 우리는 겨우 서너명이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동지들에 대한 애도라기보다는 자신들도 저렇게 잔인하게 뱃가죽이 갈려죽을 가까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흘리는 겁쟁이의 눈물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그 한가운데에, 정가운데에 용기있게 수류탄을 계속해서 날리지 않았느냐고, 왜 멈추거나 주저했느냐고, 왜 눈물을 흘리며 뒷걸음치기까지 했느냐고 한탄하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런 애꿎은 질책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곧 있으면 나 역시 잔인하게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수류탄도 모두 떨어졌으며, 우리 손에는 휘어져버린 녹슨 검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최후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우리 뒤의 지하요새에서 우리를 믿고,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올 마지막 희망을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