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핑와의 소설 『즐거운 인생』

<高兴>(즐거움)이라는 원제의 이 소설은 2007년작으로 국내에서 번역된 후 널리 읽혔다. 소위 ‘심근문학’으로 분류되는 작품으로,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 개혁개방의 파고가 이미 밀려오고 있는 중국 내륙의 대도시 시안을 배경으로 한다. 농촌 마을에서 올라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분투하는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삶을 통해 초기 농민공들의 삶이 얼마나 비루하고 처참한 것이었는지 유쾌하고 솔직하게 고발하고 있다. 작가 쟈핑와는 위화, 모옌과 더불어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다. 사실 책의 표지 이미지를 보고 화자가 '여성'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남자였다. (여성 농민공의 시선에서 본 도시와 개혁개방의 풍경을 보는 게 이 책을 산 이유였는데…)
이 소설은 배우지 못 하고 도시적인 교양도 없는 농민공 자신의 언어, 편견과 전통‧미신‧가부장제만이 아니라, 거대 도시에서 최하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고물장수 커뮤니티라는 아주 좁은 사회에서의 돈과 경쟁 등 세속적인 가치들에서 자유롭지 않은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당대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한지 드러낸다. 요컨대 소설의 제목이나 류가오싱이 도시로 올라온 후 바꾼 자신의 이름 '가오싱 高兴'(즐겁다, 기쁘다)과 달리 그의 삶은 그리 즐겁지도, 행복해보이지도 않아보인다. 단지, 그의 강력한 의지를 돋보이게 할 뿐이다.
소설의 이런 태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태도와는 다르다. 인민을 아름답게 그리지 않고, 동시에 부유한 이들을 다소 기만적인 것으로 그림으로써 중국 사회 내에 엄연히 계급적인 모순이 존재하고, 중국의 사회주의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실의 심원한 모슨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서도 어울리지 않다. 화자의 모순과 오류, 변화하는 것 같지만 끝내 변화하지 못하는 좌절감과 슬픔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존재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과는 다소 다르고, 오히려 인간군상의 다양한 측면들을 솔직하게 그려 비극성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려 하기 때문. 그런 점에서 발자크를 떠올리게 하고, 루쉰의 영향도 강하게 느껴진다.
심근문학(心根文學)이란 ‘뿌리찾기문학’이란 뜻에 가깝다. 1984년 리투오(李陀)가 ‘인민문학’ 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듬해 한샤오공(韓少功)이 《작가》지에 ‘문학의 뿌리(文學的根)’란 글을 발표하는데, 이 글에서 한샤오공은 “문학엔 뿌리가 있다. 문학의 뿌리는 마땅히 전통문화의 토양 깊은 곳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향토색 짙은 고향 이야기, 전통 문화에 얽힌 옛 이야기 등을 적극적으로 재현한 소설 양식이다. 이처럼 심근문학은 ‘고유의 것’을 말함으로써 사회주의 이념과 서구 문명이 판치는 중국의 주류문화를 비판한다. 한샤오공의 『마교사전(馬橋詞典)』(1996)이 대표작이다. 작가가 문화혁명 시기 후난성(湖南省)의 오지 ‘마교’에 하방됐을 때의 경험을 다루는 이 소설은 표준 중국어와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는 마교 방언을 사전처럼 정리했다. 소설 형식에서도 서구 근대소설의 틀을 따르지 않고 중국 문인소설의 전통을 잇는다고 한다.

사실 중국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 다른 소설은 어떤지도 알 수 없고, 심근문학의 지위 등에 대해 왈가왈부하긴 어렵다. 2000년대에 중국에서 쓰여졌으며 80~90년대 어디쯤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의 무대나 대도시의 삶에 대해서도 우리가 비평하기 어려운 것이다. 주인공 집단을 보면 8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것 같은데, 다른 인물들이나 도시의 상황을 보면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만큼 우리가 인식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그런 점을 고려하고, 우리가 한국이라는 가깝지만 먼 땅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인식한 가운데 이 소설을 읽어야 할 것 같다. 한국적 상황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60년대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이나 70년대에 발표된 황석영의 <삼포로 가는 길>과 비슷해 보인다. 캐릭터나 분위기 등에서 그런 인상이 강하다.
소설 속에서 고물장수들이나 그 주변 인물들 등 농민공 집단이 마주한 도시 사회‧도시인들은 어딘가 망가진, 인간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존재로, 류가오싱이나 우푸가 알고 있던 어떤 가치와는 다른 곳으로 질주하는 대상이다. <야채 행상은 고물장수보다 훨씬 더 힘든 직업 간ㅌ았다. 야채를 팔려면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도록 일을 해야 하는데, 고물을 줍기 시작하고부터는 한 번도 잠을 푹 잔 적이 없다고 했다. 농민들에게는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값을 깎아야 하고 세무 공무원들하고는 쥐와 고양이처럼 숨바꼭질을 해야 하며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과는 마르고 닳도록 흥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소.”>(1권 p103)
게다가 소설 속엔 당대 중국 사회의 자화상을 고발하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적나라하게 등장하고, 그대로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했다가 이내 사라지는 이 풍경들이 이 소설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아침에 둥다제 남쪽에 있는 길을 걷고 있는데 8층 건물 옥상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어. (…) 그런데 모여선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뜻밖이었어. 왜 뛰어내리지 않느냐며 어서 뛰어내리라고 소리를 치는 사람도 있고 (…) 자살하려는 남자가 내게 고맙다면서 두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절을 하더니 그만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어. (…) 그제야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어.”(2권 27쪽) 이 사건은 중국 내에서 꽤 알려져 충격을 주기도 했던 어떤 뉴스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농민공들의 삶을 완전히 비극적인 것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어떤 대목에서는 삶에 대한 농민공들의 자부심이나, 작가가 그들을 향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류가오싱의 입을 통해 드러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류가오싱은 우푸에게 이렇게 말한다. “말을 적게 하라는 게 멍청한 표정을 지으라는 뜻은 아니야.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어. 저 풀잎을 봐.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풀잎은 작은 풀잎대로 씩씩하게 자라고 있잖아. 풀잎은 전혀 비굴해하지 않잖아.”(1권 p52) “도시에서 우리의 삶은 이 쇼윈도와 똑같아. 자네가 고뇌하면 도시도 고뇌하고 자네가 웃으면 도시도 웃지.”(2권 p65)
또한 류가오싱은 엄연히 농민공이지만, 자신을 농민이라고 여기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시안’(대도시)에서 계속 살아갈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샤오멍, 저를 놀리지 마세요.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하는 사람은 실은 못 생기지 않았거든요.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농민이라고 말하지만 난 내가 농민이라고 인정해본 적이 없거든요.”(1권 p299) 그의 이런 인식은 최근 번역된 뤼투의 저작 《중국 신노동자의 형성》에서 소개하는 2세대 농민공(신노동자)들의 인식과도 같은 것이다.
나아가 농민공 집단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이들에 대해 중국 주류 사회 전반이 갖고 있는 편견을 겨누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설 속 류가오싱의 관찰을 통해 설명한다. <네 사람은 이색적인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도시 사람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이주 1세대가 아니더라도 조상들이 이주 세대였으며, 지금 도시에 살고 있는 도시 사람들은 이주 3세대에서 5세대를 결코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3세대에서 5세대가 지나면 이주한 도시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거나 아니면 도시에서 극빈층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중국의 도시 사람은 두 차례 큰 변화를 겪었다. 첫 번째는 1949년 해방과 더불어 총을 멘 팔로군이 도시로 들어와 (…) 두 번 째는 개혁개방 이후 도시로 거대한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1권 p177) 류가오싱이 대화를 엿듣는 네 사람 중에 작가가 있을 것만 같다.
중반부 이후로는 멍이춘과의 관계가 이야기의 축이 되는데, 성매매 여성인 멍이춘에 대한 화자 가오싱의 번민이 일종의 편견 속에 사로잡혀 있다. 어떤 대목에서는 남근중심적인 욕망도 거침없이 드러나고, 영원히 어떤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점도 있다. 그런 점이 이 소설의 화자에게 완전히 몰입하기 어렵게 만들며, 작가 역시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이 점이 독자를 낯설고 불편하게 할 수도 있으나, 오늘날 중국 농민공의 삶을 사실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 주목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읽다보면 일종의 ‘낯설게 읽기’를 하게 된다. 오히려 그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은 2009년 홍콩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화를 완전히 보진 못 했지만 QQ를 통해 잠시 훑어본 이 영화의 분위기는 소설과는 상이하다. 유쾌하고, 비극적이지도 않으며, 심지어 해피엔딩에 가까워 보인다. 장르 역시 뮤지컬 영화라고 한다. 당최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쟈핑와였다면 영화관을 다 찾아다니며 뒤집어엎었을 일이다.

오히려 내가 소설을 보며 떠올린 영화는 지아장커의 초기작 <소무 Xiaowu>나 <플랫폼>, 혹은 2001년에 발표한 30분짜리 다큐멘터리 <공공장소> 같은 영화들이었다. 오늘밤엔 오랜만에 <소무>를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