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과 프로필

<현기증>과 프로필

히치콕의 <현기증 vertigo>을 몇년만에 다시 보았다. 느낌은 완전 달랐고 전에는 캐치하지 못하던 것들도 새롭게 다가왔다. <현기증>에 대해서는 모든 영화 교과서, 정신분석학 입문서 등에서 반드시 언급되고야마는 텍스트이므로, 특별하게 새로웠고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중심으로 보게 되었다. 비주얼적인 측면에서 볼때 프레임이 인물(마들렌 또는 쥬디)의 얼굴 측면(프로필)을 계속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이 장면은 분명하게도, 어떤 형태심리학적인 강박증의 이미지로서 놓여있는 것 같다. 우선 이런 식의 프로필로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활약했던 궁정화가 피에로 델라 프렌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우르비노의 공작 / 공작부인> 연작이다. 이 그림이 보여준 시각은 당시로서는 가히 획기적인 시각이었다. 당시에는 거의 정면/또는 약간 틀어진 각도의 정면으로만 인물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보여주는 미학적인 성취에 대해서는 흔히 저 뒤의 원경과 두 인물의 극명한 원근법적 배치. 그러니까 마치 우르비노의 공작이 갖고 있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보여주듯 배경의 영지가 펼쳐져있고 공작과 공작부인은 서로 마주보고있다. 이상한 고집스러움과 자존감이 느껴지는데 종교화가 아니라 한 개인의 인물화로서는 거의 맨 처음 그려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볼때 역시 그런 그림의 주인공 답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어쨌든 여기서 인물을 저 먼 배경과 분리시켜주는 것은 다름 아닌 두 인물의 '형태' 그 자체이다. 또렷하게 분리된 몸의 형태만이 둘을 드러나게 만든다. 이런 식의 측면 포트레이트는 인물을 '윤곽', '형태'를 중심으로 드러나게 하는데에 뭔가 있는 것 같다.

고갱은 브뤼타뉴 시절 동료 화가의 포트레이트를 주전자로 만들었다. 그때까지도 고갱은 지나치게 새롭고 혁신적이어서 오히려 전혀 두곽을 드러내지 못하던 인상파 화가였는데 이미 이 작품에서 그런 혁신적인 면모가 느껴진다. 아예 윤곽 자체로 주전자 형상을 만들어낸 것도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이런 걸 들고 어떻게 커피나 물을 따를까. 섬뜩하게 느껴져서 전혀 사용하지 못할 것 같다. 마치 죽은 인간의 머리통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서양미술의 측면 포트레이트 작품은 이 두가지. 아,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독일의 판화가 캐터 콜비츠의 자화상! 그 작품이야말로 가장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그녀의 화보집을 보다가 본 그림인데 너무나 인상적이고 그녀 자체가 느껴져서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캐터 콜비츠의 고단한 삶, 고뇌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콜비츠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옆 얼굴을 자화상으로 드러내기도 했는데 이렇게 할때의 의도, 그리고 그걸 통해 발현되는 효과는 무엇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다분히 직관적인 감상으로 말하자면, 인물의 옆얼굴은 항상 어떤 찰나적이면서도 영원히 고착해두고 싶은 어떤 순간, 지점, 공간을 드러내는 것 같다.

<우르비노의 공작>-<우르비노의 공작부인> 연작의 경우에도 작가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후원자이자 주문자인 공작으로부터 그런 것을 원하는 강력한 요청을 받았으리라 짐작되고, 그런 욕망은 온전히 그림에서 드러나고 있다. 어떤 권력욕, 역사 속에 길이 남고자하는 욕망 같은 것. 캐터 콜비츠의 경우에는 자기 스스로를 음울하고 비극적이며 잔인한 시대의 영원히 저항하고자 하는 하나의 초상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을까. 이미 반동의 기운이 독일 전체를 점령해가고 있고, 사회민주주의당은 끝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동지들은 숙청당하거나 암살당했고, 자신은 제국주의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해나가기가 너무 어렵다.

그녀는 마치 하네케의 영화 <하얀 리본>에 나오는 가난한 산파 여인 같기도 하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의 신경증적인 속내들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산파는 호색한에 자기 딸을 농락하는 비열한 의사로부터 철저히 농락당한다.

다시 <현기증>으로 돌아와서, 추후에 스코티가 죽은 그녀와 너무나도 닮은 '쥬디'를 다시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어느 호텔에서 만났을때 기억의 소환을 통해 다시 '마들렌'과 재회하는 방식은 쥬디의 프로필이다. 영화 내내 스코티의 시선과 합치되어있는 카메라가 윤곽을 그려냄으로서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의 초반부와 후반부를 정확하게 잇는 지점들이다. 아주 또렷하게 카메라는 천천히 그 옆 얼굴을 응시하며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인다. 시간 자체가 무화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두 캐릭터이자 동시에 한 캐릭터인 이 두 여인(또는 한 여인. 중요한 스토일러적인 부분이 있으므로 생략)의 배역은 한 배우 킴 노박Kim Novak에 의해서 1인2역으로 연기되었는데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일수도 있게 분장을 달리한 점과 카메라가 의도적으로 윤곽을 그려내는 것의 충돌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확실히 객관적인 시점으로서 노출된 것이고, 두번째의 쥬디는 객관적인 시점이면서도 스코티의 시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마들렌은 자신이 스페인에서 100여년전에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왔던 다른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인으로 등장하는데, 아예 그 지점에서는 이런 식으로 그녀가 역사에서 흘러나온 인간인지, 아니면 강박증에 사로잡힌 정신병자인지조차 헷갈리게 만드는 점이 있다. 후반부의 쥬디는 이런 강박증의 반복적인 측면을 드러내는데 스코티에게 감정이입된 관객으로서는 처음에는 아예 이 반복성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서스펜스를 구현하고 있다. 섬뜩하고도 놀라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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