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식 교의들을 파괴해야하는 이유

우석훈식 교의들을 파괴해야하는 이유

우석훈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혁명은 안단테로"라는 김규항의 글을 떠올리게 한다. 열여덞살에 읽은 이 글은, 10년만에 이렇게 변이되어 우석훈으로부터 소환된다. 일찍이 김규항은 <B급 좌파>에 수록된 그 글에서, "과거의 실패가 짐스럽다면 사회주의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임을 잊지 말고 느리게 안단테로 가면 된다. 안단테라면, 우리가 혁명을 회피할 이유는 정말 적어진다. 안 그런가."라고 말한 바 있다.

이 '10년'에 걸친 동어반복이 1999년에는, 운동권의 좌절들에 대한 당찬 울림처럼 들렸다면, 2009년에는 "아직도 저렇게 찌질대는 운동권들"을 철저하게 상대화시키며, 새로 등장한 일군의 '젊은 세대'의 방황을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돌리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니까, '안단테'와 '이렇게 조용히'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데, '안단테'가 단지 삶과 운동의 불가역적인 리듬과 간극 상태에 대해서 응시하자는 요청이었다면, 후자는 "오직", "이렇게", "조용히(=얌전히)"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끌벅적한 난장판을 벌이는 것 대신, "신사답게 조용히"를 '강요'하는 이 신사를 보라. 이 진지하고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사에 대하여 코웃음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88만원세대>라는 선풍적 인기를 끈 징후적 베스트셀러의 '2부격'임을 선언하는 책이다. 그러니까 이후의 여러가지 반응들에 대한 우석훈의 '대답'이라고 보면 된다. 거기에는 여러 반응들이 있었는데, "왜 우리를 가르치려드냐"는 반동적 반응부터 시작해서, "당신을 선생님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순종적 반응, 또는 저자와 동세대인 자들의 "맞아. 방황하는 20대들을 우리가 바로잡아주어야 해."라는 반응까지. 갑자기 떠오른 이 세대론에 대한 끝없는 논쟁에 대해서는 트랙백에 트랙백을 타고가는 당신의 여행으로도 충분히 그 파장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무수한 논쟁들을 안겨주었다는 점 자체로도 일말의 의의를 갖는다. 우리는 그 정도로 폭넓게 평가해줄 수 있는 아량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책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앞서 출간된 <88만원세대>까지 함께 맥락화시키며 '20대들'에게 어떤 교의들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깊은 뜻이 너희들에게 극단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나, 사실 너희들은 아직도 나의 의도를 반정도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어. 나는 너희들이 어떤 모험을 감행하기를 바라는거야. 그러나 과격하고 시끌벅쩍한 방식이 아니라, <쿨>하게 말이야."라고 말하며, 2008~9년의 한국사회 전반과 학생사회를 되짚는다. 그리고 이 진단은 다분히 '분석가적'인 성향을 띠는데, 스스로 "모든 것을 안다고 가정된 주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듯하다. 물론, 그는 그렇게 행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88만원세대>에 따른 무수한 논쟁들, 파장들이 그를 그런 주체가 되는 것으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이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대화를 나눌때, 여전히도 결국 그/녀들이 자신에 대해서 '엄친아'에 지나지 않은 사람으로만 바라보는 것에 어느 정도의 좌절감을 느꼈음을 토로하는데, 사실은 그 말을 뱉는 것 자체가 그로하여금 그 "안다고 가정된 주체"의 자리를 즐기고있음을, 그러니까 그런 자리를 떠맡게 된 것에 대해서 어떤 퇴거를 감행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학생들에게 프로이트를 읽게 했다는 고백, 또 정신분석학의 용어들을 구사하는 것은 그의 이런 '분석가적' 행위들 이면의 진실을 알게 한다. 그는 이미, 다른 아버지들처럼, 386세대들처럼, 방황하며 자기 길을 못찾고 있는 20대들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을 '분석가'가 되어 희생하고 있다는 2차적 시대의식을 갖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들며 '피분석가'인 20대-독자들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전이된, 도태된 결과들만 낳을지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또는 파국 자체를 즐기고 있다.) 결국 이렇게 스스로 사도마조히즘적 교의들을 내뱉는 희생 아닌 '희생'을 감행하고 있는 저들 윗세대에게 약간의 처량함과 동시에 분노를 느낀다. 이들은 자신들이 온전히 떠안겨준 자신들의 '썩은 유산'을 남겨진 20대(그가 자꾸만 상대화시키려드는 '운동권 학생들'을 포함하여!)에게 남겨준 채, 그들 스스로는 홀연히 내팽겨친 그 유산들을 '왜상적 대상'으로 가두고 모든 현실적 증상들을 왜곡된 형태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몽매적으로 치료하려 들고 있다. 조한혜정의 우스꽝스러운 서문을 보면 보다 더 이런 심상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게다가 자유주의적 면모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과감하게 도입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뒤에 "이렇게 조용히"의 맥락을 덧붙이면서 '혁명'은 얼마나 쉽게 그 다의성을 잃게 되는가. 그러니까 그가 몇명의 쿨한 20대 학생의 말을 빌어, <쿨>해질 것을 종용하는 것 자체로서, 그는 얼마나 <NOT-쿨>한가. 그가 결국 '데모스'적인 광장의 폭력 사태 전체에 대해 부정함으로써, 혁명의 일부로서 폭력적이고 과격해지는 사태들 전체를 부정함으로서, 혁명의 다의성 중 절반을 제거함으로써, 결국 챙겨먹는 <쿨>함이란, 얼마나 <NOT-쿨>한가. 그리고 그가 '시대가 변했으니'라는 식으로 언급하는 근거들은 얼마나 쉽게 저 변절한 386들을 떠올리게 하는가. 그가 아무리, 진보신당 지지자이고, 케인즈주의를 넘어선 생태주의적 대안경제를 지지한다고 공공연하게 밝힌다고 한들, 혁명적 사태의 다의적 체계를 거부하는 자유주의적 맥락에 의해 그 모든 생동감 넘치는 정치들은 모두 거세되고, 일의적인 것으로 추락한다. 이는 어떤 책들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따위의 책들 말이다.

앞으로 우리는, 우석훈식의 교의들을 부수어버리는 것만이, 진정한 '혁명'의 도래를 예비하는 길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 제한적인 분량의 독서후기를 그 시발점으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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