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비극론
졸업영화를 찍어야 한다. 잘 찍고싶다. 활동과 창작의 두가지 가지를 모두 잘 잡고서 미래에 대한 희미한 풍경을 엿보면서 졸업하고싶다.
영화 연출 전공이면서 꽤나 오랫동안 (2011년 3월 이후 계속) 영화만들기와 거리를 두고 학교를 다녔다. 거기에는 무수한 사연들이 있지만 여기선 굳이 얘기하지 않으려한다. 한눈팔고 산 건 아니다. 내가 당장 "좋은 영화"를 만들 깜냥도, 진정성도 없이 어떤 허세에 사로잡혀있었다고 느꼈었기 때문이다. 4학년이 되었지만 47학점이 남아 내년1학기까지 다녀야한다.(물론 난 내년 1학기를 날로 먹을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이거 한방으로 뭘 해보겠다는 마음 같은건 없다. 그냥 앞으로 계속 영화만들기에 대한 용기를 잃지않고 살수있는 어떤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외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론이나 르포작가 같은 길이 아니라 영화노동자가 되고싶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이야기하기와 현장에서 영화만드는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순간은 항상 괴로웠고 고단했지만 언젠가 다시 떠올려보면 그것은 정말 행복한 기억이었다.(물론 모든 과거는 그런 식으로 멜랑꼴리적 회고에 의해 재구성되는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영화를 잘 찍어야 할텐데, 아직도 잘 모르는게 바로 비극인것 같다. 난 비극을 정말 좋아했고, 어쩔땐 그것이 브레히트가 루카치 비판을 위한 노트에서 밝혔듯 세계를 공고히 하는 스토리텔링인가싶어서, 때론 그것이 인간의 주체성을 더 초역사주의적으로 추락시키는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어서, 피하곤 했었는데, 어쩌면 내가 비극이란것에 대해 대단히 편협하고 왜곡된 이해를 갖고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비극에 대해 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현대인들에게 비극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실제 사건을 의미한다. 사실 요즘 실제 사건을 비극이라 부르는 사람들 중 일부는 비극이란 말에 예술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를 것이다. 그 결과 일부 보수적 비평가들이 현실 생활을 비극적이라 부르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데 반대, 그들의 동료 시민들 중 일부는 흉작이나 약물 과용을 거리낌 없이 비극이라 부르며 영화나 소설을 비극이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비극을 "현실 생활의 불행하거나 치명적인 사건(들), 끔찍한 참변, 혹은 재난"으로 풀이할 때 우리는 이것이 기껏해야 16세기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비극이란 단어의 전적으로 비유적인(figurative) 용례일 뿐임에 유의해야 한다. 현실 생활의 비극은 예술 작품에서 나온 은유적 파생물이다. 여기서 역사적 발전 과정은 존재론적으로 무엇이 더 우선적인가 하는 문제로 바뀌게 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이 유년기에 겪는 가장 혼란스런 위기가 한 편의 고대 비극 작품에 비록되어 있다고 보지만, 많은 비극 연구자들은 비극 예술과 생활 속의 비극을 혼동하는 것을 대단히 수치스럽게 여긴다. '비극적'이 '매우 슬픈'일 수 없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비극적'은 예술용어이고 '매우 슬픈'은 일상용어라는 것이다. "현실 생활에는 비극이 없다"고 W.맥닐 딕슨이 선언할 때 그는 아마도 학자로서 현실과 담을 쌓고 산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많은 연구자들이 딕슨과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급진파인 프랑코 모레티까지도 역사적 삶에 비극성이 존재함을 부정하고 '비극'이란 용어를 역사적 실존의 재현물에 대해서만 사용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보수적 이론가들은 전적으로 예술적이지만은 않은 이유에서 비극 예술을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본다. 그들은 비극을 예술의 영역으로만 제한함으로써 현실 생활의 어떤 격변도 비극일 수 없다고 뻔뻔하고도 단순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그들은 현실적 변화를 긍정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처지를 모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냉혹한 인간이라서 현실적 참변을 비극이라 부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지 비극은 평범한 재난과는 다른 기술적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런 명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환자의 병든 폐를 제거한 외과의사를 가학적이라 부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우둔하다. 전면적 핵전쟁은 비극적이지 않지만, 그것을 일정하게 예술로 재현하면 비극적이 된다. 미치광이에게나 어울리는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남들보다 두드러진 교육을 받은 사람들마닝 이런 생각이 가능할 것인데―일련의 잘못된 가정이 존재한다. 즉 현실 생활은 혼란스럽고 예쑬마닝 질서정연하다는 가정, 파괴되어 없어진 가치는 오직 예쑬 속에서만 모습을다시 드러낼 것이라는 가정, 현실의 고통이 소극적이고 추하고 비천한 데 반해 예술에서의 고통은 영웅적인 저항의 광채를 지닌다는 가정, 예술에는 생활에 없는 즐거운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그것이다."
테리 이글턴, '1부 이론의 파산', <우리 시대의 비극론> 中
요즘 테리 이글턴의 <우리 시대의 비극론>을 읽고있다. 이걸 스토리텔링을 공부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 단지 창작을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비극론은 대단히 흥미롭고도 중요한 쟁점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마주하는 무수한 비극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무의식은 그것을 즐기고 있는가? 어떤 위안을 얻는가? 아니면 그것은 오직 총체적 파국일뿐 비극이 아닌것은 아닌가? 어쩌면 그것은 다르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건 아닌가? 또한 때로, 어떤 사태에 대해 "그것은 너무나도 비극적입니다"라고 논평하는것은 문제가 없는건가? 우리가 너무 함부로 '비극'이란 기표를 남발하는건 아닌가? 이런 질문들 말이다. 그리고 물론 코앞에 닥쳐있는 기획에 대한 이런 실제적 질문도 멈추지 않는다. 당장 메이데이 전야제는 어떤 형식을 갖춰야 하는가? 비극? 부조리극? 리얼리즘적 집체극? 아니면 브레히트적 서사극? 지금까지 해왔던대로 하고싶진 않은데 너무 아는게 없다. 도움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