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로츠키 암살』 | '아무것도 아닌 자'가 죽였다

올해에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진행중이다. 2월28일까지다. 휴가 나와서 처음 가보았다. 보고 싶은 영화들은 많음에도 영상원 졸업영화제 보느라 여의치가 않았는데 <트로츠키 암살>은 제목 그 자체로 땡기는데가 있어서 굳이 가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오승욱 감독과의 시네토크가 있어서 그런지 관객들이 무지 많았고 거의 극장 안을 다 채웠다. 전에 없이 분간이 안되는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인듯 했고, 꽤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셉 로지Joseph Losey가 만든 이 영화는, 알랭 들롱이 암살자 역의 주연을 맡았고, 리차드 버튼이 트로츠키 역을 맡았다. 게다가 암살자의 연인 역으로는 알랭 들롱의 실제 연인이자 나중에 비극적으로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는 로미 슈나이더가 연기했다. 시네토크 시간에 오승욱 감독님으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영화를 찍을 당시는 이미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가 헤어진 이후이다. 그는 둘 사이의 신경증적인 연기가 결국 둘의 이런 관계의 상태에서 비롯된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일리 있는 느낌으로 보인다. 조셉 로지는 미국 출신의 영화감독인데 메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공산주의자로 지목당해 유럽으로 추방 당한 비운의 영화감독이다. 항상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죽을때까지 돌아가지 못한다. 그가 좌파였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절의 미국에서는 좌파 정치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극우주의적 시대였다. 모스크바에서 에이젠슈타인으로부터 직접 영화를 배웠으며, 뉴욕에서 연극 공부를 할때에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이론에 적극 동조해 그를 배웠다고 알려져있다. 그때문인지 그의 영화들은 모두 부르주아적 사실주의보다는 반사실주의, 브레히트의 교육극처럼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고 종용하는 형식을 취한다고하는데, 불행히도 <트로츠키 암살>이 처음 보는 조셉 로지의 작품인 나로써는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앞으로 조셉 로지의 영화들을 섭렵해야겠다는 강렬한 욕심이 생겼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트로츠키의 죽음이, 장렬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그건 확실히 기대와 달랐다. 보통 이런 정치적인 주제를 다룬 역사극에서는 위대한 혁명가의 죽음이 장렬하게 그려지고 관객인 우리 자신에게는 역사적인 반성이 요구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볼때, 처음에는, 그런 예측을 넘어서는 측면에 대해서 의심 같은게 드는데, 이 영화의 형식적인 만듦새가 워낙 괴이하기 때문이다. 숏과 숏이 기이한 방식으로 붙고, 짤라야할 지점에서 잘리지 않고 이동하는 카메라로 이어지며, 인물들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가득 차 있다. 뿐만 아니라, 기이한 방식으로 트로츠키의 라디오 연설 음향이 화면에 겹쳐지는데 그런 선동주의적인 언사들조차 신경증적으로 들릴 정도이다. 이쯤되면 이 영화가 예측된 양식의 장렬함을 보여주지 않을 것임을 알게되는데, 그렇다면 과연, 무엇에 대해 말하려하는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온 신경을 집중하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가 투우장에 갔을 때이다. 거의 묘사되기 힘든 투우 장면의 잔인성 자체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이 장면에서 몽타쥬적인 방식으로 어떤 암시, 또는 징후가 드러난다. 등에 창을 꽂혀 피를 흘리는 소의 모습 자체가 실제 그 자체인데, 이런 '소' 암살을 있는그대로 드러내는 것 자체가 상당히 과도한 측면이 있다.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그 장면이 트로츠키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럴때 투우를 즐기며 보고있는 무수한 관중들이 익스트린롱샷으로 보여질때, 우리는 영화를 보고있는 관객 전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를 보고 있는, 또는 역사를 되돌아보고있는 우리들 역시 투우극의 잔인성을 보며 즐기고있는 그 관중들처럼 그 혁명가의 죽음, 또는 혁명의 사살을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마도 감독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도 어떤 위선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마치 감독의 심리적 등가처럼 표현된 암살자 알랭 들롱 자신이 이 관음의 강박증적 참여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신경증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과적 설명을 덧붙이지 않은채, 그가 그런 신경증을 갖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해서만 묘사하고 있다. 대체 왜 그런 것인가? 그는 왜 그런 것인가?
영화 마지막에 암살자가 트로츠키를 죽이고 나서, 형사의 취조를 받을때, 그러니까 영화가 그렇게 끝날때까지도 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답을 내릴 수 없는 우리는 아주 황당한, 동어반복적 대답을 듣게 된다. 형사가 "당신은 대체 트로츠키를 왜 암살했냐?", "무슨 목적이냐?", "당신은 대체 누구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알랭 들롱이 대답한다. "나는… 트로츠키를 암살한 사람이다." 이 얼마나 우스운 대답인가. 이런 '아무것도 아닌 자'로서의 정체성은 사실 영화 내내 언급되어온 바이다. 연인인 로미 슈나이더가 그에게, 당신은 벨기에 사람이 맞지 않느냐고 말할때, 그는 신경증적으로, "나는 캐나다 사람"이라고 말하며, 또 트로츠키의 부인이 그에게 들은 바를 트로츠키에게 전한대로 트로츠키가 암살자인 그에게 되물을때, "나는 사실 벨기에 사람인데 캐나다 여권을 만든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자신의 진술을 스스로 두번 번복한 자.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된다. 이는 텅 빈 기표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가 마지막 취조 장면에서 동어반복적인 진술을 한 것도 이런 '텅 빈 기표'로서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고히 한 것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이데올로기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탈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잔여물이란, 텅 빈 기표에 다름 아니라는걸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더불어 이 영화에 대해서 우리는 <순응자Il Conformista>를 떠올릴 수도 있다. 1971년에 제작된 베르톨루치의 이 영화는, <트로츠키 암살>이 제작된 1972년과 거의 비슷한 연대인데다, 암살자의 죄의식을 다루는 영화라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다가 2년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순응자>를 떠올렸는데, 시네토크를 하며 들으니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 영화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어떤 관객은 68혁명 이후의 어떤 실망들이 이 영화에 인입된게 아니냐고 말했는데, 그건 좀 빗나간 얘기인것 같고, 도리어 68혁명 이후에 조셉 로지가 보다 더 단호하게 자신의 브레히트적 미학관을 밀어붙인게 아니냐고 묻고싶다.
우리는 트로츠키의 암살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 거의 불필요한 이야기에 다름아니다. 이른바, 영구혁명론을 주창한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정치적 라이벌로서 추방 이후에 반스탈린주의의 격렬한 정치적 선동을 일으켰고, (cf. 트로츠키의 마지막 저서<배반당한 혁명>) 그것으로 인해 전체주의자이자 파시스트에 불과했던 진정한 의미에서의 "반혁명 독재자"(오늘날 거의 모든 marxist들이 스탈린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유독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가장 그 따옴표에 힘을 실어 이야기한다.)인 스탈린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사태, 를 다시 환기하는 것. 그러나 그것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는가. 고작해야 트로츠키 조직의 회원수를 한두명 늘리는데에 미약한 효과를 주는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그 역사에 대해 그 이상의 것을 말해야만 한다. 트로츠키 암살이라는 사건에 대해 우리가 환기할 수 있는 진실은 어떤 얄팍한 인과들보다 조셉 로지가 드러내고자 했던 징후들의 양상이 아닐까? 이데올로기의 신경증이고 강박증적인 양상 그 자체 말이다. 레닌 사후에 러시아에서 발생한 스탈린주의적인 반혁명에 대해서 "스탈린이 아니라 트로츠키가 수권했더라면 혁명은 계속 쾌조를 부르며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대단히 트로츠키주의적으로 말하는 것은 거의 부질없는 목소리에 불과하다. 트로츠키야말로 순수했던 혁명가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스탈린주의적인 한계와 맞닿아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역사는 그런 한낯 정치적 쟁투에 의해서 바뀌지 않는다. 맑스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지난날 인터내셔널의 역사에서 스탈린주의가 권력을 거머쥐게 된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연적인 사건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보아선 안된다. 그러나 그마저도 사실은, 이 영화가 말하는 징후적인 목소리 앞에서는 거의 힘을 잃는다. 그것이 이 괴이한 영화가 갖는 기묘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