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서사

알고 있다. 사람들은 영웅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떤 지독하게도 가장 희망적인 기운을 품고 태어났으나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운명의 지독한 장난질에 의해 여러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으며, 이 놈의 절망적인 세계에서 자라면서 온갖 좌절을 겪었고, 아버지 부재의 상태에서 자라기도 한, 그리고 결국 절망적인 청소년기에 극심한 방황을 겪다가, 결국 어떤 시기에 어떤 계기로 인해 큰 깨달음을 얻어 방황을 마치고, 종국에는 끊임없이 승리하고 성공하여, 대척점에 서있는 권력자이자 악마인 자를 물리치고, 어둠 속에 빠진 인류의 길에 밝은 길을 밝혀주는 선각자인 영웅서사 말이다.

암흑 속에 빠진 세계는 영웅을 절실하게 원한다. 인류를 구원시켜줄 영웅을 찾고, 또 무의식적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절대절정의 위기에 빠진 내러티브에 활력을 불어넣고 스펙타클한 전망을 밝혀줄 영웅서사가 부여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카타르시스! 이때 '영웅'으로 포장될 인물은 입지전적 과거사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대기만성에다가 흔들리지 않는 척추뼈, 탱탱한 엉덩이의 소유자라면 더더욱 좋다. 섹시한 언변은 두 말할 것도 없지.

한국인들은 지난 대선에서 수차례의 횡령혐의를 지닌데다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에서 짤렸던 경험까지 지닌, 누가 보기에도 파시스트임이 확실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에겐 입지전적 성장사가 있었고, 전체 스토리 안에 영웅서사의 에너지를 부여할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중의 무의식은 이성적 각성이나 고양하는 역사의식 따위와는 무관한 것이 확실하다.

이것과는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가 선출되었다. 그가 지닌 성장사는 더욱이 입지전적이며, 게다가 인종차별과 종교와 같은 미국 사회의 높은 벽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기에 더 특별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또 뭔가 신뢰를 쏟아붇게 만든다. 게다가 그 화려한 언변과 섹시한 미소는 또 어떤가. 나도 이따금 오바마의 성장사를 화려하게 편집한 뉴스 기사를 tv에서 보면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울컥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이것은 정말 내 이성적인 자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본능적인 것이어서 무의식은 과연 사회과학적 지식에 의한 판단력과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정도였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그와 그의 행정부가 결국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초래한 세계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는 몇가지 행운들과 중국, EU와의 타협으로 많은 문제를 극복하는 것처럼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계는 대통령 1인이, (아무리 미국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는 중대한 모순을 안고 있으며, 지금의 전세계적 공황의 전야제와 같은 이 국면은 더더욱 그러하다. 결국에는 그의 카리스마나 영웅적 개인서사 덕분이 아닌, 다른 것들 때문에 역사는 흐르고 또 세계의 여러가지 국면들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영웅서사는 단순한 환각제인가?

전통적인 유물론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치부해버리고말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술이 그러하듯 정치철학에나 역사학, 사회학에도 그 안에 내재된 스토리텔링이 존재하고, 아주 종종 철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은 (비극의 어떤 면모가 그러하듯, 그런 방식으로) 극적 국면에서 등장해서, 다소 과장된 논리로 새로운 이론을 펼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종종 사회운동과도 연결된다. 안토니오 네그리나 루이 알튀세가 그런 방식으로 등장했고, 또 그 사이의 논쟁과 방황 속에서 갈등하고 투쟁했다.

그 때문에 사회운동이 스토리텔링이나 영웅서사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순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대체 뭘 말할 것인가?

베네수엘라나 쿠바, 프랑스, 베트남, 심지어 러시아와 중국에서 영웅서사는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지나간 역사와 현재 진행중인 정세는 이런 방식의 운동 방법론에 대해서 폐해와 장점을 너무 잘 설명해주고 있다. 또 다른 한편, 어떤 영웅들은 스스로 자기파괴의 지점에 다다러서 화려하게 불타 사라지기도 했다. (체 게바라, 레닌, 프랑스 68혁명의 저격당한 영웅들...) 영웅서사는 운동과 대중 이데올로기 안에 순간적인 촉발을 불러일으킬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주고 무한한 에너지를 부여해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영웅서사는 '영웅주의'와는 다른 것이며, 이미-존재하는 대중 이데올로기 안에 어떤 서사를 부여되는가가 더 중요한 고민 포인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벌어진 루카치와 브레히트 사이의 지난한 논쟁이 거둔 성과를 경시해서도 안되며, 항상 그 긴장을 버려서도 안된다. 또한 발터 벤야민이 시작한 프로젝트도 남겨져 있다. 이것들은 수십개의 연결고리로 이어져 접목되고, 경제학 비판, 정치철학과 어우러져 새로운 서사를 만드는데에 주요한 재료가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처럼 따로 떼어져있으며 경계들이 메워지지 않는 부문들의 간극과 간극 사이에도 스토리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서사학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언젠가부터 세상 앞에서 한없이 공허하고 초라해지기만 한 예술, 예술가들, 그리고 대중 이데올로기에 그런 인식의 절단과 새로운 맵 따위가 주어진다면, 다시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을까?

영웅들에 의해 자본주의의 무수한 위기들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연기되어져왔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는 어떤 서사가 기다리고 있을까? 언젠가부터 영화는 세상과는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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