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

문화연대에서 주관하는 "피리부는사나이"에 또 당첨되어서, 한달만에 또 연극 공연을 봤다. 조금 실망스러웠고, 너무 파탄적으로'만' 끝나버린 게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확실히 서사적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딱 잘라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전반부에 코믹한 두 캐릭터의 힘으로 유머러스함을 유지하고, 중간 지점에서 갑자기 장르적 변전을 시도한다. 이 지점에서 조명과 음향의 역할이 정말 중요한데, 조금 미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밍숭맹숭하고, 어떤 충격도 없었다. 그리고 그 변형 이후에 인물의 동선이 좀 더 묵직해져야만 할 것 같은데, 뭔가 표정과 동선이 따로 노는 느낌이 들었다.

극적으로는 전반부의 코믹한 뉘앙스는 잘 연출되었고, 무대미술도 나쁘지 않았는데, 후반부의 변화들이 설득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결말도 잘 납득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 죽음에서 억지도 느껴지고, 그 만화가 지망생이라는 캐릭터 자체를 너무 대상화시켰다는 생각도 든다. 안이하게 죽여버리고마는 것이다. 이 증상적 인물에겐 살아갈 권리도 없단 말인가. 내 생각에 강박증자는 결코 이런 방식으로 산화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어떤 '선한 거짓말'을 문제시하면서 그걸 적극적으로 사건 안에 기입한다. 영업사원의 경우, 젊은 시절 자기 아내를 꼬시기 위해서 그녀와 함꼐 교회봉사활동을 다니다가 만난 가난한 소년들에게 그런 '선한 거짓말'을 했는데, 그 거짓말을 철썩같이 믿었던 이 만화가 지망생은 소년 시절에 어떤 불가능한 꿈을 꾸게 되었고, 결국 그리하여 그는 불행하게 되었다는 식이다. 그러니까 그/녀들의 삶에 진심으로 천착하지 않고 임기웅변식으로 대면하는 얄팍한 관계의 태도들 자체를 도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리하여 죽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문제인가? 우리들의 불행은 그 '거짓말'들 때문인가? 이 불쌍한 만화가 지망생은 항변한다. "그때 내게 차라리 솔직히 말해주지 그랬어요? 남들처럼 넌 영원히 그렇게 살다죽을거라고 말해주지 그랬냐구요?" 오마이갓! 이쯤되면 도덕적으로 문제시되는 것은 완전히 '체제'적인 것에서 완전히 '도덕'적인 수준의 것으로 돌아온다. 무심코 내뱉는 발화들 말이다. 거기까진 좋은데 진짜 문제는 결국 이 만화가 지망생을 '죽게'한다는 데 있다. 사실 그것이 거짓말이어서 문제이겠는가? 사실 모든 발화는 어떤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죽음은 '말'이 죽게 만들었다!는 선언이다. 정말 말들이 문제란 말인가?
영업사원은 심지어 똥도 거짓으로 싸고, 목이 마르다면서 물은 마시지도 않는다. 문제시되고 있는 발화의 진실성이 배설이나 취식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몽매화된 도덕적 시선이 좀 납득되지 않는다. 만화가 뿐만 아니라 영업사원도 대상화되고 있었다. 결국 이쯤되니 정리가 되기 힘들어지는데, 그러다보니 이런 구도 전체가, 그러니까 관람하는 관객의 시선이 아니라, 전시하는 자들의 행위 자체가 증상적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이 작품에서 관객은 부차적 존재이다. 한편 이 증상적 인물 만화가 지망생은 강박증과 히스테리, 정신분열증을 동시에 갖고 있는데, 이야기는 이 증상들에 대단히 '논리적인 인과성'만 심어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점이 너무 억지스럽다. 그 무엇도 인과성만으로는 해명될 수 없다. 너무 변명스럽고 모두를 범죄자로 내몰고 반성을 촉구하기만 한다. 과연 '반성'이 가능하겠는가? 이렇게 갑자기 관객에게 들이미는 게 좀 처치곤란하게 느껴진다. 이런 인과성 그득한 드라마로는 그저, 찝찝하다가 다시 망각하게 되고마는게 아닐까? 단 한 순간도 나의 증상들과 대면할 수 없었다. 전시하기만 하는 '그들'의 증상을 구경하는 존재로서만 참여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에선 '질문' 자체가 무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