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인간의 조건>, 앙드레 말로, 김붕구 옮김. / 지만지
이 두껍고 비싼 책을 사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작년 12월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슬럼프였고, 익숙한 조울증은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구입한 앙드레 말로의 아시아 3연작 세권은 두껍고 부담스럽기 그지 없었다. 앙드레 말로는 입지전적 삶을 산 작가이다. 그런 그의 내력이 작가와 모험가, 정치가, 혁명가로서의 그의 다른 면모들을 치장하는 데 더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예컨대, 그가 <인간의 조건>과 <정복자>를 통해 20세기초 중국 광둥지방의 혁명가들의 삶에 대한 소설을 썼을때, 그 소설에는 앙드레 말로라는 입지전적 작가의 삶과 오버랩되어서 절묘한 아우라가 덧씌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을 읽을때 작품 그 스스로가 갖고 있는 내면의 것들만으로 그 소설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가능하다. 상기한 바와 같은 앙드레 말로 소설 읽기의 난맥은 지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앙드레 말로는 우리 시대 386들이 겪어온 회의를 겪었고, 그들 중 탁월한 예술가 노릇을 했던 이들, 요컨대 황지우 같은 이들의 삶처럼 철저하게 까발려진 개인사로서 역사의 굴곡을 있는 그대로 체험한 체 살다가, 죽었다. 이런 사람들을 존경하긴 어렵다. 그러나 욕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처절하고, 치열하게 온 몸으로 부딪히며 살았으니까. 그럼 변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오로지 그들 개인의 윤리가 부재해서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의 개인사 안에 노정된 것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객관적인척하는 책상 ㅈ파의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회의주의에 빠지고, 자신들의 격렬했던 과거를 청년기의 추억쯤으로 회고하는 것들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혐오스럽다. 난 절대 저런 아저씨가 되지 않겠다고 오래전에 다짐했었다.
아무튼 앙드레 말로는 후세들에 의해 이미 재평가되었다. 요컨대, 앙드레 말로는 68세대의 선배이며, 황지우는 90년대, 2000년대에 명멸해가는 운동권들의 선배라고 한다면, --- 다시 극복되어지거나 다시 한계로 노정되는 인생의 서글픈 한계들은 또 다른 다음 세대에 의해 다시 도전받을 것이다. 계속. 이 때문에 나는 앙드레 말로라는 이름이 갖는 후광 때문에 그의 소설들을 짐짓 멋들어진 자세로 읽으려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나는 자못 씨니컬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건방진 자세로 그의 소설들을 읽었다.
<인간의 조건>은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소설이다. 지만지 양장본으로 출간된 이 번역본은 독자에게 친절한 서비스 정신보다는 인내와 정독의 자세를 요구하는 판본이다. 따라서 나는 긴장한 상태로 이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앙드레 말로가 말하는 인생, 운명의 비극성과 궁극적으로 그가 일관되게 말하는 에로스-타나토스로 점철되는 삶에 대해 감명받았다. <인간의 조건>은 아시아 3부작의 다른 두 소설 <정복자>나 <왕도로 가는 길>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뜨거운 의지로 살았던, 이름없는 자들의 비극적 죽음들.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내가 아는 다른 무수한 역사들이 이 소설 위에 덧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