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하다가 메모 : 기러기아빠, 헌신, 사유, 네그리주의

기러기아빠
신자유주의에서 '가족'이란 쉼터가 아니라, 인적자본을 만들어낼 하나의 공장 같은 곳. 집은 더 이상 피로회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하늘'도 아니고, 모권 앞에서 단순한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인간이 된다. 자식을 얼마나 잘 키워냈는가가 해당 사회에서 얼마나 인정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헌신하는 주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헌신하는 주체에게 있어서 헌신하는 대상을 만들어내는 과정까지 포함해서 고민해야하는건지, 아니면 그 대상은 그냥 주어지는 것인지.
과정은 분명히 있다. 인간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던져왔다.(맑스) 우리가 새로운 문제라고 던지는 것도 결국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적인 쟁점)
문제를 던질 수 있으면 해결책을 갖고 있다는 것. 문제를 던지는 과정이 바로 헌신의 과정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 예수님과 직접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에 대한 제압. 말빨로. 이것은 쉽게 말하면, 미친 것. 왜 그랬을까? (사도바울은 원래 건축업자, 부동산개발업자, 천막 만드는 사람) 진리에 대한 충성으로 돈(미친) 사람이었던 것. 어떤 과잉과 헌신을 통해 무엇에 미쳐있는 상태. 진리에 충성. 이런 상태가 정치적인 차원에 맞닥뜨리면 세상이 바뀌는 것.
새로운 사유
대표기표(주인기표)를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적 기획. 이것이 새로운 사유이며, 새로운 사유는 결코 하늘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것, 신자유주의 프레임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는 진보세력 안에도 있다. 우파들은 모르고 있는 것. 천안함이나 북풍... 철저한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볼때 이 논란은 (능력/무능력)의 문제 -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이데올로기. 1905년 혁명이 실패한 이후, 레닌은 실망하거나 후퇴하지 않았다. 도서관에 가서 헤겔 논리학을 읽은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후에 당도할 '사건'의 '가이드'가 되기위해 헤겔을 읽으며 준비한 것.
네그리주의
주체는 다 사회적이다. 네그리의 다중은 이런 주체 문제를 담론화하고 있는데, 조금 다른 곳에 위치해있다.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충돌이 아니라, 생산력이 발전했을때 생산력이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버림으로써 '다중'이 출현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새로운 주체는 생산의 주체이다. 그러나 아감벤은 주체를 소외된 이들로 호명하고, 실제 주체란 외부화된 주체, 소외된 주체이다. 다중은 주체적 기획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자동으로 그렇게 된다는 식이다. 네그리식으로 말하면 '다중'이 출현하는 순간 공산주의가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략이나 방법론이 아니다. '낙관주의'에 대한 종교적 맹신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