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동

휴가에서 복귀했다.
남들이 모두 4.5초같다고 말하는 4박5일짜리 휴가가 내겐 45일같이 느껴졌다. 지루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시간은 너그럽고 풍족하게 느껴졌다.

휴가중 어느날 나는 어색하게 눈을 깜빡이며 안암동엘 갔다. 휴가 셋째날 저녁에 잠시, 그리고 넷째날 낮에.
셋째날 저녁, 나는 내가 아끼고 미안하게 생각하는 후배 만호를 만났다.
만호는 예전보다 조금 더 살이 찐 것 같았고, 귀엽고 어리버리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아저씨처럼 변해있었다.
졸업은 내년에 하고, 졸업하고나서는 학사장교를 갈 것이라고 했다.
학사장교로 군생활을 하는게 그렇게 편한 일은 아닐꺼야. 초임장교도 병사처럼 스트레스도 받고 몸도 힘들 걸?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먹고살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만호를 만나, 쪽문 어귀를 지나가면서 경영학과의 옛 친구들을 만났다. 태호와 재환이.
경영대스러운 패션, 경영대 고학번스러운 몸매로 무거운 백팩을 메고 학교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야. 오랜만이다, 야."
"그러게말야. 어디가?"
"공부하러 가지."
"아 그렇구나. 졸업은 곧 하나?"
"아니, 멀었어. 이제 3학년인데 휴학하고 cpa준비해."
"그렇구나. 이야. 너희 근데 정말 경영대 고학번처럼 생겼다! 하하하"
갑자기 얼굴이 싹 굳는다. 기분 나쁜 소리였을까. 아니면 별로 재미없는 농담인가?
다들 변했구나. 말썽꾸러기에 말 많던 동기들도 이제는 과묵한 고학번이 되어있었다.
아무렴 어때. 아웃사이더, 탈출자인 나는, 이제 이 20대 초반의 모든 것을 바친 공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학교 안은 보다 더 싸늘하고 건조하게 변해있었다.
그 흔했던 투쟁문구가 적힌 플랜카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정대후문에만 쓸쓸히 투쟁을 호소하는 대자보들이나 대자보 훼손에 대해 항의하는 조소와 비난이 가득한 자보가 붙어있었다. 슬픈 일이다. 쓰러진 옛 고향을 돌아보는 일이라는 것은.

늦은 밤 안암동.
만호와 나는 병맥주 한 병씩을 사와서 벤치 위에 앉았다. 이따금 옛 동지들을 만났지만 어색하게 인사하거나 모른 체 지나쳤다. 이제는 다들 고시생이거나 토익 공부에 열중인 취업준비생들이 되어있었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직접 목도하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에 조용히 박수를.
검은 밤 하늘 위의 구름은 모두들 지쳐서 금방이라도 쏟아져내릴 것처럼 머리 위에 둥둥 떠있었다.

학생회관에 들어갔다.
재작년 겨울이나 작년에는 결코 갈 수 없었던 동선이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고 아직도 외롭게, 그러나 수북히, 꽂혀있는 <고대문화>들을 보는 것은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여전히 같은 말, 같은 현실. 같은 규탄, 같은 질타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곳을 쳐다보지 않았다.

"형 왜 이렇게 말투가 염세적이야?"
정말? 아니. 난 비관주의자가 아니야. 난 모든 걸 긍정해. 모든 가능성을.
혼자 상상하고 회상하기만 하던 시절들이 내 몸짓, 내 말투를 염세적인 것처럼 만든걸까?
그래, 미안해. 내가 왜 이럴까.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가봐.
내 20대 초반을 바친 곳. 스물한살부터 스물네살까지, 모든 에너지를 바친 곳, 그 많은 눈물이 흘려졌던 곳이잖아.

학생회관은 아직 몇개의 동아리들이 지키고 있었다.
생활도서관은 버젓이 버티고 서서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최근 번역본들이 꽂혀있었고, 들뢰즈와 우석훈 등의 신간들이 최신서적 서가에 꽂혀있었다.
4층에는 아직 몇개의 동아리들이 버티고 있다.
한국근현대사연구회의 새내기는 아직 단 1명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연구회의 문은 자동잠금장치로 굳게 닫혀있었다. 도둑들 때문이다. 나는, 혹시나 H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복귀하면 완전히 과거를 잊어야지. 과거에 묻혀 살지말아야지.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슬프지 않아. 죄책감으로 괴롭지 않아.

죄와 벌이여, 그리고 안암동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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