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으면서 든 생각

2008년 8월 6일

플로뵈르 소설 두권과 발자크의 인간희극 5권을 읽고는 그들로부터 드디어 "안녕을 고"하고, 어정쩡하게 스탕달의 소설을 읽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의 종지부를 <적과 흑>으로 찍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왠걸, 스탕달의 <적과 흑>은 <마담 보봐리>보다는 보다 더 낭만주의적이었으며,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이나 <고리오영감>, <사라진느> 따위의 위대한 소설들보다는 훨씬 더 설명적인 구석이 많았다. 만연체의 대화들로 이루어진 발자크의 소설들보다 감정이나 심리, 사건에 대한 작가의 설명적 구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조금 실망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지만, 재미없진 않다.

어서 근대 프랑스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을 띄고, 기 드 모파상과 보들레르의 오묘하고 신비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 관물대에는 모파상의 단편집 5권과 보들레르의 <악의 꽃>, <파리의 우울>, <보들레르> 3권이 목을 길게 내빼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괴팍하고 성질더럽기 짝이없는 자뻑 천재 소령의 샤우팅으로부터 받는 모든 업무적 스트레스가 아름다운 소설들이 날려주고 있다. 올 여름, 프랑스 근대소설들은 나의 안식처이자 나의 종교임에 틀림없다. 그립고 아쉽고 슬프고 가슴 아픈, 바깥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잠시 잊고 좀 더 2차적인 차원에서 상상력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런 훌륭한 소설들이 안겨주는 평온함이 수도원 생활에서의 인간관계나 낙관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지금은 자신감이 충만하고, 당분간은 계속 그럴 것이다. 요놈의 역마살만 덜 했더라면 좀 덜 답답했을텐데 말이다.

2008년 8월 9일

900여페이지에 달아하는 이 두꺼운 소설은 좋지 않은 첫인상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새로운 면모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 이것은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경계에 서있는 소설임은 분명하지만, 서사적 측면에서 낭만주의와 결별했으며, 문체의 측면에서는 낭만주의적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인 쥘리앙의 계급, 소유의 벽은 그가 지닌 무한한 욕망과 항상 부딪히고 갈등한다.

보잘것 없는 벌목공의 아들 스무살의 젊은 쥘리앙은 파리라는 부르주아와 귀족 계급의 갈등의 공간에서 사랑과 명예 따위의 것들을 쟁취할 수 있을까? 그리고 부르주아들 사이의 쟁투, 귀족 계급과 왕당파의 경계들 속에서 실패한 비극의 주인공이 아닌 성공한 혁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또 그는 아름답고 고결하지만, 지체높은 귀족으로서의 권태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는 여인과의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이런 모든 질문들은 시대적 상황, 계급, 욕망... 등의 관념들과 부딪힌다. 단순한 애정 서사가 아니다.

2008년 8월 10일

이 소설은 당시로서는 시대의 경계를 과감히 뛰어넘는 위대함을 보여주는 서사와 캐릭터를 지닌다.

주인공인 쥘리엥은 서사에서의 "영웅"적 욕망을 지니고,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으려 무수한 역경을 거쳐간다. 요컨대 이 낭만주의의 문체로 애정소설의 위장을 휘감은 이 소설은 하나의 모험극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혁명, 그리고 나폴레옹 제정시대, 왕정복고의 쿠데타 이후의 반동기라는 프랑스역사를 뒤흔드는 역동적인 시기의 정치사회적, 문화적 풍경들도 함께 엮어서 그려낸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는 이런 시대가 거대한 모순과 청년들에 대한 불행한 운명을 만드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낭만주의자임을 자처해온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인 저자 스탕달은 정치적인 내용을 자신의 소설에 노골적으로 넣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낌에도 이런 시대적 배경을 경외하지 않고 서사 안에 삽입한다. 그것을 빗겨서는 그 어떤 이에 대한 것이든 그의 사랑과 욕망, 죽음에 대해서 충실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변사"처럼 등장하는 저자의 시선이 독자의 시선과 어우러져 한 시대의 풍경과 비극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캐릭터에 역점을 두는데, 그가 바로 하층계급 목수의 아들 쥘리엥 소렐이다.

우리는 쥘리엥 소렐같은 불행한 운명에 처한 청년을 지금 이 시대에도 발견할 수 있다. <적과 흑>이 170여년이라는 시간을 뚫고, 2008년의 나에게 감흥을 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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