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본 어른의 세계,「남쪽」

소녀가 본 어른의 세계,「남쪽」

「남쪽」(El sur)
감독 빅토르 에리세, 1982, 스페인

스페인 감독으로 '과작의 현인'이라는 신비주의적 별칭을 갖고 있는 빅토르 에리세의 두 번째 작품이다. 데뷔작인 「벌집의 정령」이후 두번째 작품으로 그가 10년만 내놓은 영화다. 전작보다 신비적 색채도 잃고, 그 특유의 롱샷, 롱테이크의 미학적 기풍도 잃은 듯하다. 그러나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다.

전작처럼 '소녀'의 눈으로 본 어른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여전히 어른들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이성의 세계이기도 하고, 망각과 상실의 세계이기도 하다. 소녀가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을 90분내내 비춘다. 소녀의 아버지는 스페인 내전 공화군으로서 참가한 듯하다. 전작에서의 아버지의 설정과 비슷해보인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부모와 싸우고 고향인 남쪽에 가지도 않고, 수맥을 찾는 직업으로 생활하는 남자다. 어느날 소녀는 아버지의 신비스러운 다락방에서 이레네 리오스라는 이름을 무수히 많이 적은 메모를 보고 '그녀'가 아버지에게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한다. 우연히 지나친 극장 앞에서 상영중인 영화 포스터에 적힌 이레네 리오스라는 이름을 발견한 소녀는 더 궁금하고,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침대 아래 숨어 아버지에게 반항하기도 하고, 소리없이 보이지않게 싸우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 어엿한 10대 소녀가 되었지만,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내면의 화해를 시작한 그 무렵, 어렴풋이 알듯했던 아버지는 다시 소리 없이 사라진다. 바지주머니속의 모든 것까지 그대로 두고, 어디론가 떠난 것이다. 그리고 소녀는 어머니와 함께 남쪽으로 떠난다. 알 수 없는 세계로.

빅토르 에리세 특유의 신비주의적이고 '베르메르'의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미학적 은유들로 가득찬 이 영화는 한 소녀의 성장담이자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소녀의 감수성을 중심으로 한 시선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소녀 스스로 목격하며 어느 정도 시린 성장을 겪기도 한다. 이 영화를 본 오늘, 나의 부모도 이별을 선언했다. 지난 몇 개월간의 갈등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슬펐다. 부모님과 싸우고, 방에 돌아와 본 이 영화가 내 현실, 내 삶과 묘한 일치를 이루는 듯 했다. 삶 속에서, 곰플레이어 재생 화면 속에서 내 삶이 1982년의 스페인 소녀와 마주쳤다.

베르메르, <창가에서 편지 읽는 소녀>
영화 『남쪽』 중
영화 『남쪽』 중

Subscribe to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운다

Don’t miss out on the latest issues. Sign up now to get access to the library of members-only issues.
jamie@example.com
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