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하는 상상

김예슬씨의 선언을 경유하여 사건을 당도한 우리는 이제 우리들 자신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이 던지고 있는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언할 것인가?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선언할 것인가? 만천하에 말이다. 어쩌면 이런 고민은 내가 혹시나 나의 나르시시즘을 노출증자처럼 까발리려드는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런 상상하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노출증자가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진정 자기 삶의 고뇌를 까발릴 수 있는 자는 모종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 '모종의 트라우마'란 자기혐오와 공포의 트라우마를 말한다. 공포를 느끼거나, 자기 자신을 혐오하거나. 항상 그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는가. 궁극적으로 정세적인 곤궁에 처한 한 세대가 그걸 벗어날 수 있으려면 결국, 집단적인 연대망으로서 자기 곤궁을 까발리고 드러내야만 한다. 자기-혐오에 빠진 '자기'도 드러내고, 공포를 느끼는 '자기'도 까발림으로서 우리는 일종의 모순적인 위기에 처한 '삶들'을 공개하고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공유' 자체가 청춘에겐 무지막지한 힘이 되리라 믿는다.
이제 나의 찌질한 자기혐오증적 면모들과 겁쟁이같은 두려움의 면모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너무 많이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려면, "이걸 모두 까발리면 나의 인간적 매력이 모두 상실되고말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조차 드러내야 한다. 이게 가장 어렵다. 선언하는 상상, 당신도 나도 이제 사건을 만들어야 한다.
어찌 어제밤의 그 심각한 우울증이 이렇게 조증으로 번질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