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나타난 부랑자

비로소 사람들이 공간으로서의 서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 시선들은 '비로소' 본격화되었다. 이것은 몇년전 청계천 복개사업 논란으로부터 거슬러올라가며, 더 멀게는 청계고가도로를 무너뜨리고 동대문 근방의 옛 아파트들을 부수는 계획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한국에서 둔갑한 신자유주의의 여러 남매들 중 한 녀석이 자신을 도시계획으로 위장하려다가 청계고가도로를 무너뜨렸고, 아파트들을 무너뜨렸다. 이명박씨가 청계천을 되살리는 대공사를 결정했을때 왈가왈부 말들이 오갔고, 공간으로서의 서울에 대한 논란은 대중화되기에 이르렀다. 그전부터 몇몇 건축학자들을 이 논의의 불이 어서 지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전 김숨, 김애란, 편혜영, 하성란같은 여류 소설가들은 <서울, 어느날 소설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서울'이라는 공간을 주제로 삼은 기획-단편소설집을 출간했고, 또 몇몇 영화평론가들은 최근의 어떤 작가주의 경향의 영화들을 '서울'이라는 공간과 묶어서 소개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홍상수나 봉준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때 서울-공간을 언급하는 것은 최근의 주된 레퍼토리가 되었다. 다만, 대체로 인상비평이며, 뭐라뭐라 얘기는 하는데 맥락적인 연관성을 크게 갖지는 못하다. 그냥 그래 보인다는 것이지.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래 보이긴 하다.

작년 2월경 남대문이 불탔을때 사람들은 '서울-공간'의 비정형적인 형태들과 빌딩숲이 만드는 무역사의 공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미' 역사가 거의 소멸된 이 대도시에 남대문의 전소는 말그대로 마지막 상징물의 붕괴처럼 다가왔다. 남대문이 복원되어가지만, 이 대화재를 스펙타클한 tv생중계로, 목격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복원된 남대문을 '역사'로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공간의 다른 것들과 같이 복재된 무수한 것들 중 하나쯤으로 여길 뿐이다.

도무지 이 도시에는 역사화된 공간이라는 것이 없다. 이곳에서 땀을 흘리고, 목숨을 잃고, 또 온전히 제 노동을 바쳐온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들은 건축물들의 붕괴와 새롭지만 무국적의 건축물이 세워지면서 온전히 땅 속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오늘날 대안 문화, 민중에 의해 기억된 역사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전복이 필요하다면 이 끊임없는 붕괴와 증축으로 반복되는 공사 왕국의 메커니즘부터 아작내야 할 것이다. 이 놈의 멍청한 도시, 서울의 멍청한 시스템을 말이다.

더군다나 관료자들은 오직, '질서'와 '안전' 이것만을 도시지배의 제1원칙으로 삼는다. 역사도, 삶도, 일상도, 거리의 토론문화도, 사랑도, 그들의 안중에는 없다. 그들에겐 오직 돈, 즉 세금과 질서, 즉 시위와 노점상이 없는 도심거리가 중요할 뿐이다.

전역하면 아주 오래, 한동안은 서울에서만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괴망측한 언어들이 난무하는 그곳에 우리들의 말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무일푼으로 거리를 제멋대로 떠돌아다니며 질서를 망치며 다니고, 지나가며 아무한테나 자신의 속생각들과 욕망, 고민들을 털어놓다가 박장대소 웃다가도 땅을 치며 울어버리는, 어느 꾀죄죄하고 젊은 부랑자의 이야기를.

Subscribe to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운다

Don’t miss out on the latest issues. Sign up now to get access to the library of members-only issues.
jamie@example.com
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