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층 엘리트들만의 '세번째 정치분파'를 구축하는 게 쉬울까, 대중운동을 바탕으로 한 좌파의 정치적 비전을 전면화하는 게 쉬울까?

상층 엘리트들만의 '세번째 정치분파'를 구축하는 게 쉬울까, 대중운동을 바탕으로 한 좌파의 정치적 비전을 전면화하는 게 쉬울까?

휴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 끄고 살려고 노력 중이지만 쉽지가 않다.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자처하는 직업적 정치인들이 상층 엘리트들 간의 연합을 통해 '진보주의자들이 참여하는', '세번째 정치분파'를 유의미하게 구축하는 것이 쉬울까, 좌파가 자신의 대중운동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이를 통해 반자본주의적 사회운동의 정치적 비전을 전면화하는 것이 쉬울까?

전자는 현실적이고 후자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둘 다 공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둘은 질적으로 다른 도전이다. 전자에는 요행이 필요하지만, 후자는 요행보다는 집단적인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 전자는 소수의 움직임으로 이뤄지지만, 후자는 다수의 움직임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전자에게 대중은 '유권자' 혹은 여론조사 지표상의 숫자일 뿐이지만, 후자에게 대중은 본격적인 싸움의 주체이고 운동의 에너지 그 자체다.

전자를 향한 시도들은 지난 사반세기 사이에 무수히 많이 있었다. 진보정당이나 민주노총, 시민단체에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 몸 담아온 많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행보를 정당화하고 "제3의 길"이라 부르는 노선으로 옮겨갔다. 안철수 신당에 참여한 많은 노동운동가, 시민운동가들을 떠올려보라. 당시 여론조사나 정치지형에서 안철수는 금태섭보다는 훨씬 더 가능성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후자는 좌파가 자신의 정치적/대중적 기반을 충실하게 '다시' 만드는 과업이다. 이것이 '다시' 시도되는 이유는, 근 10년 사이 그 과업이 공히 확인된 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이 상층 정치, 기성정치판의 과두제적인 과업에만 관심을 갖는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후자를 위한 과업에 몰두해왔다. 그런데 정의당 내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치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심지어 노동 문제를 둘러싼 여러 쟁점들에 있어 신자유주의적인 포용성 프레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짐짓 균형잡힌 관점을 갖추기라도 한 것처럼 노동자운동의 '지키는 투쟁'을 비난하는 보수언론과 보수이데올로그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내용은 별 게 없지만, 으레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공격들이 그렇듯, 분위기를 타면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흔히 상층정치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은 쉽게 함정에 빠지는데, 자신은 정치쪽에 몰두하고 있으니 정치적 문제는 자신들이 맡아야 하고, 자신이 가장 예민하게 판단하리라는 착각이다. 이런 역할분담론은 사실 탈정치의 후과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정치는 정치인이, 노동은 노동운동가들이, 인권은 인권단체가, 시민사회 문제는 시민단체들이 맡으면 된다는 식으로 사고한다. 이런 관점은 직업적 상층정치인들을 함정에 빠뜨리는데, 진보정치의 관점에서는 결국 정치의 판도를 바꾸는 것조차 정치인들이 아니라 조직된 대중의 몫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1년 동안 주도적으로 해온 일이 무엇이었을까? 지난 1년의 시간을 직무성과급제 추진과 탄력적 근로시간제, 노조에 대한 이념적 공세 등 반노동 공세의 1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조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건설노조는 최근 10년 가장 가파르게 조직세를 확장해왔고, 건설산업 현장의 많은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일터에 대한 조직된 노동자들의 통제력을 높여왔다. 여러 한계도 있지만, 가능성을 많이 보여주기도 했다.

정의당의 여러 상층 정치인들은 노동 문제에 대해 무지하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노동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당내의 몇몇 인사들의 입장에 대해 사리판단할 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정의당에서 대표단을 맡고있거나, 주요하게 활동해온 활동가들조차 조성주식의 노동개혁론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이유는 이들이 탈정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역할분담론'의 궤도에 사로잡혀온 탓도 있어보인다. 사람의 시야와 사고는 위치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기층 단위에 있을 때 갖추고 있던 사회운동적 사고는 오히려 상층으로 가면서 매우 협소해진다. (그러나 기층단위에 위치해 있지 않더라도 사회운동적 시야를 견지할 길은 얼마든지 있다.)

전통적인 진보정당노선은 조직노동 등 조직된 대중운동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유럽의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노동조합의 진보정당은 오랫동안 지속되는데다 영향력이 있지만, 소셜미디어나 포퓰리즘적 발언에 기댄 조직 없는 지지는 매우 짧은 시기에 그친다. 그러니 정당은 응당 조직된 대중을 필요로 한다.

반면 최근 조성주 등이 조직노동과의 결별 혹은 선긋기를 선언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진보정당노선'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을 한 것은 진보정당노선으로부터의 이탈을 반영한다. 논리적 모순을 피하려면 진보정당노선이 아니라, 그냥 어떤… "제대로 된 리버럴 정당" 같은 길을 선택하겠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것이 앞서 말한 '전자'의 노선일텐데, 소위 '금태섭 신당'에 동조하든 그렇지 않든 사회운동으로부터 무관심하거나 멀어진 진보주의자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자기 정당의 '리버럴화'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명확한 대중적 기반도 없는 리버럴보수/진보주의자들의 신당이 정말 '제3당'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선거 이후의 흡수통합이든 무엇이든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설령 그 당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젠더 문제 등에 대해서는 민주당보다 조금 진보적이고, 노동정책이나 사회정책은 신자유주의적 포용성으로 채운 노선이 명확한 '제3의' 노선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제로다. 그러니 이런 노선도 결국 직업 정치인들의 자기 생존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양당제를 무너뜨리고 사회정치적 구도를 '삼분지계'(이런 표현 쓰긴 싫지만…)로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몇몇 명망가나 정치인들이 합종연횡을 거듭한다고 해서 이룰 수 없다. 닭이 먼저든 달걀이 먼저든 한국사회의 양당제 구도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반영이고, 양당제를 변화시키는 것 역시 이원대립적인 대중 이데올로기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날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제도 혹은 기술적인 시도로 일시적으로 양당제가 흐트러질 수 있는데, 그조차도 하나의 출발에 불과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로부터 시작된 변화 역시 대중운동 없이는 불가능하다.

2023년 6월 14일 오후 10:39 페이스북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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