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사실 나는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라캉과 함께였기에 약간 위로는 됐던 것이다. 나는 『철학교육평론』에 기고한 어느 글에 붙인 엉큼한 각주에, 마르크스가 '경제적 인간'을 거부한 것하고 똑같이 라캉은 '심리적 인간'을 거부했으며, 그것에서 엄밀히 결론을 끌어냈다고 썼다. 며칠 뒤 라캉이 나를 불러냈다. 우리는 여러 번 같이 식사를 했었다. 물론 그것은 한 번 더 내가 라캉에 대해 '아버지의 아버지' 구실을 한 것이었으며, 더욱이 라캉이 힘든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이다. 입에 물고 있는 그 우스꽝스러운 라캉의 시거와, 인사라고는 그저 "아니 입이 삐뚤어졌군!"이라고 말할줄만 알았던 내가 생각난다. 대화 도중에 종종 자기의 몇몇 '정신분석 환자들'을 험담하던 라캉은, 특히 남편과 함께 나란히 정신분석을 받는 부인들을 험담했다. 생트-안느 병원에서 자기를 내보내려는 위협이 있은 뒤 몹시 당혹스러워하는 라캉을 보고, 나는 고등사범으로 올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 어느 날 담배 연기를 더 참을 수 없게 된 플라스리에르는 라캉을 해고했다. 그때 나는 아파 학교에 없었다. 라캉은 집으로 전화를 해 내 주소를 알아내려고 엘렌느에게 한 시간이 넘도록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다. 한순간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신 목소리를 알 것 같군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엘렌느는 "친구예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끝이 났다. 라캉은 몹시 항의를 해댔지만 고등사범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내가 더는 보지 못했지만(단지 그 사람에게 내가 더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라캉은 멀리서 내게 일종의 동무가 돼주었다. 우리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서로 의견을 나눈 적도 있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생산의 특별 차출'이나 '폐기물들', 이유도 없이 돌이킬 수도 없는 손실들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생각을 나는 오래 전부터 해왔다. 말브랑슈가 비가 내리고 있는 '바다와 사구, 그리고 넓은 길들'을 끝도 없이 얘기했을 때, 나는 이런 내 생각이 이미 그 사람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그때 유물론적인 철학자에 대한 내 '이야기'를 생각했는데, 유물론적인 철학자란 그 기차가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달리고 있는 기차를 잡아타는'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비록 발송은 됐지만 여전히 수신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편지들'을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라캉이 쓴 "편지는 언제나 그 수신자에게 이른다"라는 구절을 읽었다. 그 놀라움! 그런데 그 일은 한 젊은 인도인 의사 때문에 복잡해졌다. 그 의사는 라캉한테서 잠시 정신분석을 받았는데 결국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당신은 편지가 언제나 수신자에게 도달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알튀세르는 반대로 말하더군요. 편지가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고요. 알튀세르가 유물론적이라고 한 그 명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캉은 족히 10분은 생각에 잠겼다(라캉에게 10분이라면 엄청난 것이다!). 그러더니 간단히 "알튀세르는 이론가이지 실천가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나는 라캉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상 정신과 치료의 전이 관계 속에서 감정적 공간은 완전 밀착된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틈도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무의식에 제대로 보내진 모든 무의식적 메시지는 반드시 그 살마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내 설명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라캉이 옳았지만 나도 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캉은 어떤 점에서도 관념론으로 비난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시니피앙의 물질성에 대한 라캉의 이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바로 거기서 나는 해결책을 보게 됐다. 즉 라캉은 정신분석적 실천의 관점에서 말했고 나는 철학적 실천의 관점에서 말했던 것인데, 서로 다른 이 두 영역은, 비록 내가 당시에 고전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철학적 영역을 우위에 놓는다거나 그 반대로 하는 것, 즉 과학적 실천 위에 철학적 실천을 놓는다거나 그 반대로 하는 것 등, 상대방에 대해 내가 그 위위를 결정할 수 없는 두 영역이었다. 그래서 우리 둘 다 옳기는 했찌만, 아무도 우리 사이의 의견 대립의 근원을 명료하게 간파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 일로 나는 라캉의 명석함을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됐다. 라캉의 말 중 몇몇 부분은 애매하고(공허한 말, '로마의 설교'풍의 말들) 아마도 진정으로 심사숙고된 결과는 아닐 테지만, 라캉은 재빨리 차이점을 느끼고 그 점을 '지적'할 줄 알았다.
나는 라캉의 말년에 또다시 부딪친 적이 있었다. 그때는 PLM 호텔에서 라캉의 마지막 공개토론회가 있었을 때였다. (…) 나는 아무 허락도 없이 거대한 홀 안으로 들어갔다. 한 젊은 여자가 다가와 어디 대표로 왔는지 묻기에 나는 "리비도의 다른 명칭인 성령의 이름으로요"라고 대답했다. (…) 광대처럼 파란색 체크 무늬의 단색 트위드 재킷을 걸치고 있는 이 키가 큰 늙은이가 내게 불러일으키는 최대한의 존경심을 갖고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피분석자들을 대신해' 발언하면서, 참석자들이 피분석자의 처지에서는 얘기하지 않는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분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느 학파의 정신분석에 대해 말하는 거요?" 나는 태연하게 내 이야기를 계속했다.”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15장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