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작은이모부가 돌아가셨다. 늦은 밤. 과수원에서 트랙터를 타고 농약을 치다가 사고가 났다고 한다. 아니, 그래서인것 같다고 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생각난다. 그때 난 일곱살이었다. 그가 결혼하기 바로 전이었는데, 그는 내가 처음으로 사귄 농부였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얼굴이 까만 사람이었다. 여름날 늦은 저녁이었는데, 막국수집에서 맛있는 막국수를 먹다가 나와서 그가 무등을 태워주었다. 낮은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모두 몇명이느냐고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칠천만명이라고 했다. 그래, 그렇지. 맞아 칠천만명이야. 북한에 있는 동포들까지 합치면 칠천만명이지. 우리 명교 똘똘하네. 그런데 아저씨는, 아니 삼촌은 (그는 분명 이모부가 될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삼촌이라고 했다. 왜그랬을까?) 북한 사람들한테는 못주고, 여기 남쪽에 4천만명 먹여살리는 사람이여. 삼촌은 사과, 배, 포도, 감 이런 과일들 맛있게 농사짓는 사람이여. 나중에 명교가 어른 되면 통일 될꺼여. 그럼 그땐 7천만명 먹여살려야지.

왠일인지 잊을 수 없는 대화였다. 그리고 알았다. 농부는 위대한 사람이란걸 알았다. 그후로 거의 평생 어떤 직업인을 막론하고 그처럼 주체적이고 자존감이 강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는 한때 영동군농민회 사무국장이었으며, 어떤 도시인들보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사람이었다. 여느 농민들처럼 술을 무척 좋아했고, 알코올 중독이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 어머니는 이모와 이모부가 재배한 사과를 직접 가져와 수백상자씩 직접 팔아주곤 했다. 사과가 너무 맛있어서 동네 아파트 단지 집집마다 몇상자씩 사가곤 했다. 그때 우리집에는 사과상자가 가득했고, 나는 쉴틈없이 사과상자를 날랐다. 두 상자씩 나른다고 힘이 장사라며 엄마가 칭찬해주면 기분이 좋았다.

대학시절 갔던 농활, 그리고 무수한 농민 집회. 그 자리에서 꼭 한번씩은 그를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못본지 10년이 훨씬 넘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언제 마지막으로 그의 과수원에 갔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아주 오래전에 이모는 그와 이혼했다.

나는 가끔 그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나지 못했다.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군대에 있는 중,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자꾸 무기력한 회상만 거듭하고 있다. 귀에서 비린내가 난다. 오늘이 그의 장례식이다. 나는 조금전에 그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죽음에 대한 낭만주의적 회고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에 대한 위로를 하고 있는것인가. 불편한 내 마음을 위한 위로? 어느 고단했던 영혼과 다시는 나지 않을 맛있었던 사과에 대한 위로인가. 모르겠다. 어린시절 수없이 많이 먹었던 충북 영동의 박장균표 사과를 기억한다.

[한국농정신문] 박장균 전 전농조국통일국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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