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헤어조크의 <싸인 오브 라이프>

베르너 헤어조크의 <싸인 오브 라이프>

베르너 헤어조크의 데뷔작으로 알려진 영화 <Lebenszeichen>을 봤다. 영어 제목은 "Signs of life"이고 1968년작이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에게해의 크레타섬이다. 독일 나치 소속의 작은 규모의 군대가 이곳에 주둔 중인데, 옛 성 안에 만들어진 거대한 무기창고를 단 네 명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세 명의 남자와 그리고 그 셋 중 한 명인 Wolfgang Reichmann이 분한 주인공 Stroszek의 연인. 그는 어느날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다가 부상당해 이 섬에 오게 되었다. 영화는 이 네 명의 병사들이 겪는 극단의 권태로움과 광기에 대해서 그린다. 전쟁 한가운데에서도 이 섬의 네 명은 총도 들고다니지 않고 전혀 군인같지도 않다. 그저 무기창고를 지키며 사소하고 일상적인 소품들에 대해 집착하고 조금씩 미쳐갈 뿐이다.

반복되는 일상, 고립된 공간에서 작은 충돌들을 겪지만 카프카의 소설에나 나올법한 설정들이 참 기괴하게 느껴진다. 한 떠돌이 집시 방랑자는 거대한 주크박스를 등에 메고 다니며 자신이 왕이라고 이야기하고, 또 섬의 외곽에 사는 한 남자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어린 딸과 살고 있다. 이들이 하는 일상이라고는 로켓폭죽을 만들거나, 벌레를 잡는 장치를 발명하거나, 혹은 수탉을 잡아와 그것의 신기한 행동을 구경하는 것 등 뿐이다. 그런가운데 스트로첵은 결국 미치고 마는데, 그의 증상을 우려한 지도부가 그에게 제대 조치를 내리고만 것이다. 격분한 스트로첵은 화를 내며 총을 들고는 동료들을 모두 성에서 내쫓고 홀로 크레타의 옛성을 점령하고, 총을 들고 마을까지 내려온다. 그러나 그가 고작 죽인 것은 작은 당나귀 한 마리뿐이다. 그는 성루 위에 올라 밤마다 로켓폭죽을 터뜨린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명령도 듣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점이 근대의 가장 외딴 지점에 위치한 현대적 인물들이 드러내는 카프카적 세계의 지점이다.

여기서는 어떤 사물의 기호들, 동물들, 풍경들, 전통적 풍속들, 석상들도 제각각 반응하고 스스로 작동한다. 그러면서 카메라는 가히 연극적 무대를 드러내는 '구성된-카메라'와 마치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다큐멘터리적인-카메라'의 변주를 지속한다. 이런 게 정말 인상적이었고, 멀리는 시네마베리테적이라고도, 그리고 주요한 몇몇 장면들은 하네케 영화의 느낌도 강하게 났다. 하네케가 확실히 헤어조크의 이런 면모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가장 많이 생각난 영화는 <늑대의 시간>이다. <늑대의 시간>이 그려내는 가상적 공동체-공간의 인간군상, 광기, 공동체의 붕괴 등의 모습은 이 영화의 그것과 쏙 빼닮았다. 게다가 마지막 숏이 인상적이었는데,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끝나고 카메라가 어딘가 트럭의 뒷편에 올려져 찍은 듯한 이 숏이 이어지면, 아주 기나긴 이동숏이 계속된다. 흙바람이 휘날리는 비포장도로를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고, 마치 어떤-공동체를 떠나가는 듯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것은 미쳐서 거대한 광기의 저항,퍼포먼스 벌였고 이내 체포되어 귀가조치되는 스트로첵, 혹은 카메라 그 자체, 혹은 감독의 시선, 어쩌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과거를 응시하는 68년의 시선일 수도 있다.

지휘 장교들이 스트로첵의 저항에 대한 대책을 논하다가 창밖을 바라보니 그가 옛성의 성곽 위에서 로켓폭죽을 터뜨린다.

스트로첵의 저항이 사살한 것은 늙은 당나귀 한 마리 뿐이다. 트럭이 그것을 끌고 간다. 어쩌면 마지막 쇼트는 죽은 당나귀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스트로첵은 밤마다 크레타섬의 하늘에 폭죽을 터뜨린다.

이런 영화를 찍고 싶다. 예전부터 머리 속을 공회전하는 느낌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있었는데,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한대로 헤어조크 영화들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며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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