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연구작업은 1927년 즈음 시작된 사유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브레히트, 숄렘 등과의 논쟁 과정을 통해 보다 더 촉진되었으며, 점점 변모해갔다. 역사 유물론에 입각한 문화, 시공간에 대한 벤야민의 사유는 점점 더 그 근거를 마련해갔다. 파리라는 "세계적 상징"(19세기 영국 빅토리아 헤게모니의 자본주의 시기의 수도는 분명 런던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상부구조로서의 수도는 단연 자본주의의 예술과 '쓰레기들'이 집적된 파리라고 생각했다.)은 한 세기 뒤인 20세기를 살고 있으며, 나치즘이라는 괴물이 세계를 지배해나가는 과정을 공공연히 목도하고 있는 이 "20세기 최후의 지성인"(한나 아렌트)은 자본주의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혀 다른 세계로 개척해나가는 길로 지난 시간의 탐구를 택했다. 바로 19세기 파리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종종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호르크하이머나 한나 아렌트, 심지어 학문적 동지라 할 수 있는 아도르노부터도 오해받고 왜곡받아왔다. 벤야민이 단순히 인용문들의 몽타쥬만으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구축하려했다는 오해(아도르노)가 그 중 하나이며, 또한 이 미완성의 거대한 작업을 상부구조/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만 치부해 사회조사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의 포스트모더니스트의 프로젝트들 중의 일부로 취급받음으로써 벤야민의 정치철학에서 '정치'를 제거하려 했던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이는 아마도 벤야민이 무수한 저작들을 통해 아주 사소한 것들, 요컨대 매춘, 마약, 파리의 아케이드, 보들레르, 유토피아, 꿈, 푸르동, 셍시몽, 카발라, 유대 신비주의, 파리 국립중앙도서관, 그리고 <자본>과 어린아이들의 놀이와 장난감까지, 우리 주위에 위치한 사물로부터 역사적 당위와 진실을 찾아내려고 했던 것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물들이 그 내재된 사물 속으로부터 사물 스스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의 사유들은 다소 신비주의적이며 형이상학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있어왔던 것이다. (특히 맑스주의-좌파들로부터) 그러나 그의 연구들을 따라가다가 어떤 순간에 다다르면, 마치 벤야민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대의 산책자로서의 입지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성과 진화론의 역사가 밝혀내지 못한 많은 것들을 들춰낼 수 있으며, 말그래도 존재하는 세계를 모조리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통해 혁명론적 미학의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다.
벤야민은 아주 종종 미학자로서 취급되기도 한다. 그가 주로 상부구조에 대한 연구에 집념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를 단지 미학 안에 위치시키는 것 역시 위험하다. 그의 연구에는 경계가 없으며, 또 그가 만약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했다면, 19세기 파리, 자본주의에 대해 사고하는 그 사유의 경계는 허물어졌을지도 모른다. 몇개월 전에 <일방통행로>를 읽고나서 벤야민에 빠져들었고, 그의 다른 논문들과 에세이들, 그리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사진의 작은 이야기>이라는 이름 높은 논문들을 보면서 그 깊이에 매료되었다. 그는 자신의 미완성 연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지나간 역사를 몽타쥬화하려고 했다. 이것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 잘 파악하지 못했다. 아마 6권짜리로 구성된 이 거대한 연구를 다 읽고, 또 읽고나면 대충 감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만약 영화도 역사의 아케이드를 산책하듯 공간과 시간 속에서 '산책자'로서의 카메라-코기토를 견지할 수 있다면, 죽어가서 결국 오래된, 골동품 따위로 명멸해가는 영화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맥락 안에 위치한 현대의 거의 얼마 되지 않는 영화들이 몇몇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허우샤오시엔과 지아장커의 영화들, 그리고 후기 고다르의 영화들이 그것이다. 이 소중한 유산이 21세기에도 이어져야만 한다. 벤야민의 미완성-연구가 만약 영화에 의해 다시 시작된다면, 그리고 이 작업이 다수에 의한 프로젝트로 이어진다면?
발터 벤야민에게 푹 빠진 사람이라면, 건축 전공자라면, 예술이 지닌 탐구적인 시야를 갖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세계의 하부구조가 지닌 복잡다기하고 산만하며 이리저리 엉켜있는 실타래의 구조와 공기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터 벤야민의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경계를 가르지 않는 연구이다. 그는 이 미완의 작업으로서 사회학, 철학, 정치학, 역사학, 영화, 사진, 건축 등에게 세워져있는 지적 권위자들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그러나, 미완이기에 이 프로젝트는 아직도 진행중이며, 이 완성되지 못한 19세기 파리에 대한 거대한 서사시는, 수십여년간 파묻혀졌다가 최근에 와서 다시 이어져가고 있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완수해야할 의무가 있다.
읽다가 지치기도 하고, 내가 과연 이 엄청난 인용과 인용의 반복, 층과 층의 짜깁기를 읽는 것이 효과적인 일일까 하는 의심에 수백번정도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런 의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3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거대한 저작을 모두 읽었을때, 세계는 조금 더 다르게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