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담

저녁에 홀로 반디앤루니스엘 갔다. 실은 <빈자의 미학>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역시 반디앤루니스에도 그 책의 재고는 없었다. 가끔 절판된 책은 어떤 대형서점 구석탱이에서 발견되기 마련인데 <빈자의 미학>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학교 도서관에 한 권이 있으나 대여가 허용되지 않는 책으로 지정되어있었다. 하릴없이 다른 책들이나 들춰보았다.

민담 코너에 가서 한국구전민담을 모조리 모아놓은 5권짜리 세트를 보았다. 그 중에서 호랑이와 곶감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얼마전부터 구상중이던 어떤 플랜 때문이었는데, 보다 많은 힌트들을 얻게 되었다. 아무래도 장편영화가 되어야할 것 같다. 거기에 3D애니메이션까지 들어가니 한 10년후쯤엔 만들 수 있을까. 호랑이가 어머니를 잡아먹고 오누이가 하늘로 도망치는 이야기도 읽었다. 내가 알던 것보다 더 잔인한 측면이 있었다. 요컨대 어머니가 떡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길에서 어머니는 그냥 잡아먹힌 게 아니었던 것이다. 열두고개를 넘으면서 그녀는 처음에는 왼팔을, 그 다음 고개에서는 오른팔, 그리고 왼발, 오른발까지 하나씩 내주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부디 아이들을 위해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왜냐하면 그녀에겐 아무것도 가진게 없고, 어린 아이들만은 보살펴야했기 때문이다. 팔다리가 모두 먹힌 다음에 그녀는 데굴데굴 굴러서 산을 넘는다. 최근에 접한 그 어떤 이야기보다 육체적 치열함이 이처럼 부각되는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다.

<황구연 민담집>도 발견했다. 나중에 이 책을 사고싶다. 이 책은 옌볜 용정에 살았던 황구연이라는 민담구술가가 쏟아놓은 모든 민담을 엮어놓은 것이었다. 1909년에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그는 젊어서 만주땅으로 이주했으며, 젊어서 무수한 고생을 하면서도 서당 스승과 주위 사람들, 동네 어른들로부터 민담을 듣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전하는 옛날 이야기들의 매력에 그처럼 헌신적으로 빠져들었던 이가 누가 있었을까. 그의 머리속에는 천여개의 옛날 이야기들이 숨겨져있었던 것이다.

문화혁명 당시 황구연씨는 홍위군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때문에 10년간 입을 다물고 지냈다고 한다. 이런 예는 분명, 문화혁명의 오점 중 하나일 것이다. 민담은 단순히 구시대, 봉건시대의 잔재나 심심풀이 땅콩의 옛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필술'로 남는 지배계급의 역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어온 피지배계급 민주의 상징화된 역사이다. 민담에는 옛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도 숨겨져있지만, 수백년전 민중들의 고통과 눈물, 회한의 역사도 담겨져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거리낌없이 넘나들기까지 한다. 그것은 '상징'들로 표기되는데, 신화적인 사건들이나 동물들, 기괴함들이 그 증거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과하며 변이되고 성장되어왔다. 아주 오래된, 묵힌 욕망들이 그 안에 숨겨져있다. 그것에서 민속적이며 지역적인 욕망들의 뿌리를 발견하는 것은 오늘날에 민담을 접하는 이의 몫이며, 만약 이것을 또 다른 방식으로 변이시키며 오늘날의 상징 세계로 옮겨놓는다면, 그건 또 다른 방식의 구전이 될 것이다. 멀리 켈트족 민담이나 그리스 신화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땅에도 무수한 신화들이 있었다. 오늘 2시간여간 들춰본 민담집들 중에서 <황구연 민담집>이 단연 돋보였다. 그 책 한권을 옆에 끼고 있으면 이야기들이 샘솟듯 쏟아져나올 것만 같다.

Subscribe to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운다

Don’t miss out on the latest issues. Sign up now to get access to the library of members-only issues.
jamie@example.com
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