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자본주의의 초상「아메리칸 갱스터」

「아메리칸 갱스터」American gangster, 미국, 2007,
감독 리들리 스콧, 주연 덴젤 워싱턴, 러셀 크로우
갱스터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정치사회적 구현을 모두 끄집어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1968년 미국의 베트남 침략이 한창이던 시절, 뉴욕 교외의 할렘가에서 시작된다. 당시 미국은 국내에서는 거센 반전운동의 물결로, 나라 밖에선 베트남 전쟁으로, 그리고 흑인 빈민들이 모여사는 할렘가에서는 갱들의 마약으로 병들어있는 모습이다.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고 썩어 있다. 특별마약단속반 형사들마저 갱들의 마약을 압수한 뒤에는 다시 그 마약을 옅게 희석시켜 되 팔거나 마약매매꾼들로부터의 뇌물로 이 기형적인 사회 구조에 기생하는 것이다. 이들은 마약밀매조직이나 갱들이 없어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자기 밥줄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당시 할렘가를 주무대로 시작해 뉴욕의 마약매매 라인을 장악했던 실존 인물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 분)는 이렇게 유지되어오던 어떤 견고한 질서를 자기 중심으로 바꿔놓는다. 태국의 중국인 화교 마약 재배상으로부터 직접 마약을 구해와 순도100퍼센트의 것을 보다 더 싸게 파는 것이다. 게다가 상표까지 달고, 경찰이 파악할 수 없는 정도의 정교한 '합법'을 가장한 밀매망까지 구축한다.
이 영화는 '마약밀매상'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 질서의 정치경제학적 면모를 잘 구현하기도 한다. 종전 후 미국의 경제헤게모니는 수직적 통합을 통한 독점구조를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 자본주의가 수평 통합형의 독점 자본주의였다면, 미국 자본주의는 철저히 수직 통합을 통해 내부 거래 비용을 줄여 자기 경쟁력을 갖추는 형태였던 것이다. 프랭크 루카스의 마약거래도 그런 식이다. 그는 공군기를 이용해 원산지인 태국으로부터 직수입해와 중간 마진을 완전히 제거한다. 그리곤 싼 값에 좋은 물건을 팔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시장을 장악해간 것이다. 프랭크는 자본가 신사처럼 행동하고, 이탈리아 마피아 가족처럼 대가족을 고향에서 불러 거느린다. 사실 '갱'의 행동을 하고 있지만, 여느 자본가와 다를바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프랭크의 모습은 미국 자본주의 질서 안의 자본가의 얼굴을 상징하기도 한다.
시장은 교란되고, 다시 재편된다. 여느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역시 여느 자본주의 질서가 그러한 것처럼 여기에는 정치가 개입되고 이런 정치 투쟁과 경제 구조의 맞물림 속에서 프랭크는 잘 적응하지 못한다. 아니, 적응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흑인'이고, 이 영화의 중간중간에 tv 중계 대상으로 흘러가는 당시의 전설적인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처럼 어떤 점에서 '진보'와 '반 미국적'인 무엇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마피아 대신 그가 위치한다는 것을 용납할 백인, 또는 시장의 경쟁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프랭크는 청렴함을 추구하다가 되려 썩은 경찰 동료들의 왕따가 된, 뉴저지 모 카운티의 특별마약수사단 단장 러셀 크로우 등으로부터 덜미를 잡혀 체포된다. 여기서 그의 짧은 신화가 마무리지어지고, 다시 미국적인 것, 시장은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프랭크와 리치 로버츠 형사(러셀 크로우 분) 모두 프랭크 하나가 잡힌다고 그런 것이 해결된다고 믿진 않는다. 다만 로버츠 형사는 프랭크의 뇌물 제안까지 거부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해야하기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패한 경찰들을 체포하고, 마약상들을 소탕하고. 그러나 그런 것으로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이 영화는 그것마저도 냉정하게 인정한다. 환상을 유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이 영화를 지지할 수 있다.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다. 역시 <블레이드 러너>의 리들리 스콧! 명감독은 아직 죽지 않았다.
물론, 결말부의 법정 시퀀스는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다. 이것은 안전하고 대중적인 방향으로 영화를 끝맺으려는 선택이다. 차라리 마지막에 프랭크가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나와서 사방의 경찰들에게 포위되어 세상 속에 혼자 남겨진 듯한 그 공허하고 황량한 느낌으로 영화가 끝맺어졌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리들리 스콧은 끝을 다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