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에서 말로를 만나다
군대에서 낙서 쓰듯 남긴 소설(?)
그날 밤 무작정 부서진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 담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뭔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나로서는 순순하게 복종은 하더라도 절대 후퇴 같은 건 하지말자는 게 인생의 지론이었으므로 그 상황에서 다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냥 앞으로 갈 뿐이었다. 새벽 세시경이었을 것이다. 한참을 뛰고 또 뛰었는데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에 다다라서야 내가 신발을 신지 않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발바닥엔 온통 진흙투성이었고 돌부리에 찔려 피도 흘리는 것 같았다. 그걸 안 건 대략 여섯시쯤. 이미 고속도로변까지 갔을 때였다. 무작정 서쪽으로 달리다보면 뭔가 나오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뭔가 나왔다. 서해고속도로에서 트럭 한 대를 얻어타고 무조건 남쪽으로 달렸다. 어디로 가시게? 글쎄요. 남쪽이요. 무조건 남쪽이요. 아저씨는 그거말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기는 어차피 목포로 가는 길이니까 목포까지가고나면 내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깔깔이에 주황색 추리닝 바지 차림. 영락없는 탈영병차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트럭 뒤에 올라타 몇 시간을 달렸는데 아무도 뒤쫓지 않았다. 트럭 운전수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 자체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때 나에겐 확실히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절박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트럭에서의 그 몇 시간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른다. 분명 한 겨울의 얼음같은 바람이 몰아닥치고 있었지만 심장까지 사르르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오 목포로 가는 서해고속도로의 따스함이여. 전라도땅의 이 폐절적인 고요함이여.
몇 시간을 달렸는지 모른다. 족히 다섯시간은 넘게 달렸을 것이다. 목포의 선착장에 다다랐을 때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트럭에서 내리기 힘들다는 걸 알았다.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움직이려했지만 몸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발바닥은 시꺼멓게 얼어붙었고 보들보들한 볼 위에는 성에 같은 것이 끼어있었다. 영락없는 도망자 신세에, 처량한 도둑고양이같은 꼬라지였다. 그때 운전석에서 내린 트럭 운전수 아저씨가 피곤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는 번쩍하고 나를 들어 올리더니 짐짝을 팽개치듯 땅 위로 내던졌다. 어느새 나는 하나의 덩어리 같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그게 꼭 싫진 않았다. 나로서는 나를 존재하지 않는 무엇, 하나의 사물, 짐덩어리 쯤으로 취급해주는 그가 너무 고마웠다. 부대 안에 있을 때에도 나는 아무 관심도 쏟아주지 않는 녀석들이 너무 고마웠었다. 요컨대 짬이 다 차도록 진급에 떨어져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예비역이 될 날만 기다리는 박소령 같은 녀석들. 그러나 그런 녀석들은 너무 드물었다. 대부분은 서로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아부어대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나를 좀 내버려둬,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게 귀찮았고 지긋지긋했다. 얼어붙은 발, 퍼렇게 질린 눈, 이런 식의 얼어붙은 상태가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날이 몹시 춥다고 했다. 운전수는 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두고 상당히 오래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때 그의 동료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같이 의논을 하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심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보아서 목포항의 토박이 짐꾼으로 짐작되었다. ‘저게’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했느냐고 묻자 운전수가 ‘저것’은 죽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를 ‘저것’이라고 칭해주니 너무 감사해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안간힘을 써서 허리를 숙였다. 아무리 짐짝 같은 존재가 되어도 염치는 있어야지. 내게도 최소한의 윤리 의식은 남아있었나 보다. 짐짝에게도 의식은 있다! 그냥 딱 이 정도의 윤리가 좋다. 이야말로 21세기적인 윤리가 아닌가? 인간이란 최소한 자기 도량 껏만 예의를 지키고 아무에게도 침범하지 않으면 그렁저렁 무리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 않나. 아 참. 나는 인간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깜빡하고야 말았다. 자꾸만 이걸 잊게 되는데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날도 온종일 내내, 나는 버려진 짐짝이야, 나는 버려진 짐짝이야, 라고 되뇌이며 보내야 했다. 그 정도면 확실히 충분했고,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날 하루를 항구의 적재장에 내팽겨진 채 보내고 날이 저물 즈음 나는 거의 완전히 허리를 굽힐 수 있었다. 거의 열두시간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인사를 다 했을 때에는 이미 운전수와 짐꾼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들은 오랜만의 회포를 푸느라 낮부터 어디선가 소주를 들이마시고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늦은 밤이 다 되어서 둘이 나타났을 때 그들에게서 주먹고기 냄새가 폴폴 풍겨왔다. 둘은 완전히 술에 쩔어있었다. 별 수 없는 인간들이로군. 순간적으로 나는, 대책 없이 망조가 들어가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운전수가 내게 다가왔다. 뭐야 이거! 이봐, 이봐! 이것 좀 보라구! 이 녀석이 완전히 네모가 되어버렸잖아. 그 머시기 거시기 아니여! 맞어, 맞어. 정말 그렇네 그랴. 이걸 보고 무어라고 하는가? 정육면체인가 뭔가 하는거 아니여! 그렁게, 정말 그렇네 그려. 정육면체여! 와 신기허구먼 허허. 그랬다. 나는 정육면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허리는 완전히 굽어서 접혀져버렸고 가슴은 허벅지 위에 거의 완전히 붙어버렸다. 두 팔은 완전 반대방향으로 꺾여있었고 발목도 관절의 반대방향으로 휘어져버렸다. 신기한 것은 내게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그 상태가 너무나도 편안했다는 점이다. 나는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 이거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이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대해주시니 말예요.”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몸이 얼어붙어 말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적적이게도 말은 온전하게 할 수 있는 상태였던 게 아닌가. 운전수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 듯 떨었으니 말이다. 뭐야, 너. 살아있었던 거야? 그럼요. 살아있구 말구요. 이게 다 아저씨 덕분인걸요. 자 어서요. 날 저 짐짝들과 함께 보내줘요. 보내달라구? 어디로? 어디로 보내달라는 거지? 원하는 게 뭐야, 이 괴물 같은 녀석아! 전 그냥, 단지, 그저, 영원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이 세상과 무관하게 사는 거예요. 스트레스 받는 것도, 고민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지겨워요. 성욕을 느끼는 것도, 섹스를 하는 것도, 사정을 하고나서 허탈해 하는 것도 지겹구요. 저는 지금 이 상태가 너무 좋아요.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거든요. 단지 감사하다는 생각뿐이에요. 이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하고 또 감탄스러워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말예요. 정말이에요, 정말! 운전수는 짐꾼과 뭔가 상의하는 것 같았다. 벌겋게 상기된 표정에 코는 시뻘게 가지고 말이다. 잠시 티격태격하며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힐난을 쏟기도 하더니 이내 모종의 합의를 보고 나에게로 다가왔다.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하고도 조심스럽지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가 말잉게. 너를 거시기(마카오)로 보내기로 했어부러야. 거시기 가면 법적으로다가 아무 문제가 읍기도 하고. 또 거시기 뭐야 너를 좀 비싼 값에 팔아넘길 수 있거든. 게다가 머시기(관세)도 거의 없고 말야. 우릴 원망하지마. 우린 단지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었을 뿐이니께. 그거시 다여. 혹시 우리가 널 거시기 해부는 것에 대해 불만이라도 있는감?”
아니. 나는 아무 불만이 없다고 했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모든 해명을 다 하겠다고 말했으며 그의 핸드폰에 서약의 녹음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른 짐짝들과 함께 마카오로 가는 작은 상선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 배는 사실 상선이라기보다는 통통배에 가까웠다. 5톤급의 고기잡이배와 비슷한 크기였고 적재한 짐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마카오로 가는 것만은 확실했다. 일단 이 배의 국적이 마카오였다. 뱃머리에 초록색 바탕에 흰색 꽃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노란색 별 다섯 개가 있는 마카오 국기가 달려있었고 선원들은 쏼라쏼라 쏟아내는 중국인들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내가 인간과 짐짝의 중간쯤 되는 존재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술을 마셔대느라 바빴고 뱃고동을 울리며 뱃길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느라 온 신경을 그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튿날에는 눈까지 내렸는데 바다 한 가운데를 떠다니는 통통배 위로 내리는 눈의 풍경이 꽤나 아름다웠다. 갑자기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걸 느꼈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어느덧 밤이 오고 또 적막이 흘렀기 때문이다. 셋째 날에는 아마도 오키나와 근방을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타이완 근방일지도 모른다. 나는 저 멀리 남쪽에 커다란 섬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배는 그 섬을 경유하거나 우회하지도 않고 냉정하게 빗겨 지나갔다. 거기에서 어떤 서운함과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뱃사람이란 보통의 뭍의 인간들보다는 어떤 낭만적인 구석이 조금씩 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왠지 실망스러웠다. 넷째날부터는 태풍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다들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북쪽 근방에서 일기 시작한 태풍이 점점 북쪽 해상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쏼라쏼라 중국말로 무전이 쏟아졌는데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물이란 언어의 경계마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고 대단히 놀라웠다. 나는 내가 혹시 스웨덴어나 산스크리트어도 알아듣거나 말할 수 있는지 대단히 궁금해서 입을 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참아야 했다. 만약 내가 말을 해버린다면 이 산 괴수같은 선원들이 나를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꾸욱 참으며 어서 배가 마카오에 다다르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배는 아주 약간의 풍랑만 만났을 뿐 큰 사고는 겪지 않았다. 남중국해로 접어들 즈음 선장과 선원 한 녀석이 애정행각을 나누었는데 나로서는 처음 보는 남자들간의 섹스였다. 생각보다 징그럽지 않았고 꽤나 에로틱하고 서정적인 느낌이었다. 이 거친 남자들에게 이런 에로틱한 면모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에로틱함이 꽤나 서정적이라는 사실도 놀라웠다. 마치 프랑켄슈타인과 헐크맨이 잔잔한 멜로디 속에서 뒤엉키는 느낌이랄까. 왜 그 두 괴수에게도 애상적이고 부드러운 면모는 있지 않은가. 킹콩의 멜로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이 섹스를 하는 걸 목격한 것 자체는 내게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는 것이다. 갑자기 어떤 절망감이 몰아닥쳐왔고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한기가 싸늘하게 온몸에, 피부 속까지 스며들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는 뭔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 내 자지가 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태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전혀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마도 내가 허리를 다시 펴고 일어서려면 적어도 1년이 걸릴 것 같았다.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괴로운 몇 시간, 아니 수십 시간이었다. 이렇게 괴로울 때는 꼭 오래 간다. 빌어먹을 욕망. 그러나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뱃고동이 울리자 잠에서 깨어났다. 이른 아침 동이 트기 무섭게 우리가 탄 배는 마카오항에 다다랐다. 1920년대 식민지풍의 중국적인 멋스러움이 고스란히 남겨져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선원들이 쏼라쏼라 시끄럽게 떠들으며 짐짝들을 내리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도 항구 하역장 위에 내려져있었다. 그리고 몇날며칠이 지났고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 모든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했다. 중국인 선원들이 모두 가버리면 나는 나의 장점을 발산하며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서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렸고 그러면 나는 꼭 맹랑한 말투로 우스꽝스러운 옛날 유머를 지껄여 대리라. 그리고 지난 달 말경, 그러니까 이곳 마카오 시각으로 늦겨울의 마지막 수요일 오후, 그가 온 것이다. 그가 다가왔을 때 나는 대뜸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요컨대 소녀시대는 이수만 녀석으로부터 노예 계약을 맺어 지금 착취당하고 있으며 소녀시대를 구출하는 길은 얄상하고도 소극적인 방식의 공정거래법 개정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에 의한 정치적 투쟁과 혁명뿐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내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워했고 예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매우 드물게도 눈썹을 오므락거리는 과감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네이비색 더치풀코트차림에 붉은색 땡무늬 스카프를 말끔하게 맨 차림으로 다가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지껄이다가 선장을 찾아 데려왔다. 선장은 중국말로 말하고 더치풀코트의 그 남자는 프랑스어로 말했다. Je peux payer par carte bleue? 마침내 거래가 이루어지자 나는 그의 차 트렁크에 실릴 수 있었다. 그의 집은 마카오 시내의 옴싹달싹 못할 정도로 자그마한 2층 벽돌집이었다. 유럽식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새가 없는 건물이었는데 페인트칠은 아주 많이 벗겨져있었다. 그곳은 그의 사무실 같은 곳이었다. 한쪽 벽에는 붉은기가 걸려있었다.
“당신의 이름이 뭐죠?”
“저의 이름은 A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왔구요. 오해가 있을 것 같은데 소녀시대의 팬은 아니랍니다. 그저 그 아이들의 인권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 뿐이구요. 오해는 말아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더요. 당신이 저를 구매하기 위해 꽤 많은 돈을 지불했다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해서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진 않을 겁니다. 그걸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아무리 정육면체에, 짐짝에 불과하다지만 저는 이렇게 보시다시피 말도 하고 숨도 쉬는 하나의 생명체이고 제 나름의 존엄이 있으니까요.”
“아니, 아니. 오해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놀라웠을 뿐이에요. 저는 당신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 소녀시대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죠? 한국을 가리켜 하는 말인가요? 우리는 지금 시대를 가리켜 제국주의의 시대라고 부르지 않나요?”
그와 나 사이에는 엄청난 오해의 간극이 있었다. 그는 지금이 제국주의 시대라고 말하며 자신의 이름은 앙드레, 즉 앙드레 말로이고, 프랑스에서 왔으며 아시아 모험 중에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1920년대라는 것이었다. 나는 2010년의 한국에서 왔으므로 아주 한동안은 납득할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는 나에게 시내의 풍경을 보여주고 마카오헤럴드라는 이름의 석간신문도 보여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모든 게 1920년대의 풍경 그것이었고 신문도 1923년 3월 8일자였다. 믿기지 않았지만 모든 게 그의 말 그대로였다. 꿈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건 사후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분간은 다시 큰 변동이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남중국해상에서 중국인 선원들 간의 서정적인 섹스를 훔쳐보던 사이에 시공간과 세계 사이에 틈입 같은 게 생겨 모든 게 뒤틀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의 기묘한 감정을 나는 기억한다. 엄청나게 성욕이 끌어 올랐고, 동시에 슬펐으며, 즐거웠고, 또 심각한 멀미에 시달리고 있었다.
앙드레 말로씨와 나는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나의 짐짝으로의 변화가 나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권리의 기각으로 인해 발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분명 해명하기 어려운 사태이지만 때때로 세상엔 놀랄만큼 믿기 어려운 일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신이 인도 북부에서 탐험을 할 때에도 그랬으며 라오스에도 기괴한 풍경들을 많이 보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라오스에서는 날개가 달린 원숭이도 보았다고 했다. 자신이 총으로 그 원숭이의 날개를 쏘아맞추었는데 그 날개달린 원숭이는 피를 흘리며 강 아래로 고꾸라졌고 자신을 쏘아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젊은 시절의 치기 어린 모험심으로 총을 쏘아버린 자신의 행위에 대해 후회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자책하지 말라며 당신은 나중에 문화부장관까지 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믿기지 않아했다. 그러는 게 당연했다. 당시로서는 오직 혁명 운동에 투신하는 길을 자신의 평생 과업으로 여기고 있던 그였으니 말이다.
“나는 당신이 혁명가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소설을 쓴 것 자체를 비난하고 싶진 않아요. 대신 당신은 훌륭한 소설을 썼으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노년기에 보여준 행각들만은 비판하고 싶네요. 당신은 우파정권인 드골정권 치하에서 문화부장관직을 맡으면서 파리의 시네마테크를 뒤엎는 결정을 하고 말거든요. 누벨바그리언들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랑글루아를 내쫓죠. 그건 분명한 정치적 몰락이고 변절인데가, 심각한 반동이에요. 그거 알아요?”
“뭐라고? 넌 미쳤군. 알 턱이 없지. 그런 건 아직 저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니까요. 갑자기 당신을 믿기 어려워지는군요. 저는 당신의 말을 믿지 않으렵니다. 당신은 지금 말도 안되는 말을 지껄이고 있거든. 설령 여기서 죽거나 파리에서 자본가들의 손아귀에서 죽을지언정 우파정권의 고위관료가 되진 않아! 그건 나를 모독하는 말이고 나는 당신의 거짓말에 속지 않을거니까요!”
그가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되었다. 실은 그가 믿지 않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1968년에 앙리 랑글루아를 해고하고 말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할 즈음 갑자기 서울아트시네마가 떠올랐다. 이는 지극히 우연한 일이었다. 마치 그와 나 사이의 90년의 시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이 1923년이든 2010년이든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입대 이후로는 단 한번도 현실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던 나로서는 이 우연한 공명이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갑자기 모든 게 귀찮다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말로씨와 함께 하는 며칠간 나는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와 나의 지나온 삶들, 그리고 서울아트시네마가 불현 듯 떠올랐던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말이오? 그럼 오히려 당신이 한 이야기는 당신 자신이 자행한 것에 대한 자기비하가 아닐까 싶소만. 그의 어처구니없는 정신분석에 실소를 금하기 어려웠으나 당장은 그가 나의 주인이었으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척 행동했다. 나는 잘생긴 그보다는 조금 못생겼고 또 젊은 날에나마 혁명운동에 가담했던 그보다는 훨씬 더 찌질하게 젊은 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잘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나는 사랑조차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나란 인간은 대체 뭔가. 목포항의 헐렁한 거적데기라도 나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우울해졌다. 점점 더, 극심하게 말이다. 그리고 며칠간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도무지 입을 열 생각을 않던 나를 보며 안쓰러워하던 말로씨가 갑자기 강력한 등유난로 두 개를 가져와 내 옆에 두었다. 나는 이제 이런 것은 전혀 소용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예 말하는 것 자체를 잊었는지 입술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가 며칠 전 그는 태국에서 데려왔다는 여성 둘을 대동해서 등장했다. 두 마사지사는 화려한 솜씨로 내 몸 곳곳에 테러를 가했다. 발바닥으로 마구마구 눌러대고 쑤셔댔는데 어찌나 뻑쩍지근했던지 누를 때마다 우지근쩍지근 소리가 났다. 괜찮아 좋은 징조야. 계속 하다보면 풀리겠지. 마사지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노력은 정말 가상했고 혁명가적인 진지함에 비견할만한 무엇이 느껴졌다. 앙드레 말로 씨도 그런 여성들의 진지함에 감탄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점점 내 몸이 펼쳐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금씩 펼쳐지던 내 몸은 이내 제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밤. 내 몸이 완전히 펼쳐졌음이 선언되었다. 그들은 고된 노동에 소금에 저린 생선처럼 ‘쩔어’ 있었지만 자신들이 이루어낸 성과에 스스로도 탄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입을 열지 않던 나는 급기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왜. 왜 나를 펼쳐낸 거죠? 난 이걸 원하지 않았는데. 정말이라구. 말로씨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 자신이 캄보디아에서 겪은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캄보디아에도 예전에 물건이 된 쏘티샤 왕자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그 왕자는 자신의 아내의 옆에 놓여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껴 수 십년 동안을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아내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냉정히 그녀를 떠날 수도, 그녀에게 화를 낼 수도, 원망하는 말을 뿜어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그는 완전히 사물 그 자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말로씨는 그게 바로 정치적인 냉각 상태로서 영원한 숨을 불어넣어줄 지언정 더 이상은 인간이 아니므로 비참한 상태로 영원을 맞이하게 된다는 의미의 교훈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재탄생을 축하해주었다. 나는 곧 서울로 보내질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서울아트시네마를 지켜내는 데 힘을 다 하라고 말했다. 나는 그래봤자 1920년대인데 무슨 소용이느냐고 따졌다. 당신은 지금 나를 일제 치하의 사지로 보내는 거나 다름없으며 1년 내내 뼈빠지게 농삿일을 해보았자 공출로 나 빼앗기고 남는 건 쭉쩡이뿐이라고 따지기도 했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그저 가보면 안다고만 말했다. 그땐 그런 그가 싫었다. 이런 식으로 혼자 담담한 척 하는 자들이 언제나 싫었다. 그러든말든 그는 나를 정말 서울로 보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어제 서울로 이송됐다. 이곳은 1920년대의 경성이었다. 앙드레 말로 씨의 예상은 정확하게 빗나갔다. 나는 영원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인가. 아마도 불가능한 것 같다. 이미 돌아간 과거에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나의 과학적 교양 지식이 낸 결론이었다. 비참하도다. 그러나 나는 말로씨를 원망하지 않는다. 도리어 내가 원망하고 싶은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유인촌이다. 그는 계속해서 예술계 안에서의 전횡적 독단을 벌일 것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의 색깔론을 주창하고, 구조개혁이라는 미명하의 반동적 결정들을 자행하며, 독립영화전용관을 무능한 듣보잡들에게 넘기고, 서울아트시네마에는 모종의 압박을 가하며 교체를 도모하려들 것이다. 당장에 나는 안창호 선생이나 김구 선생을 찾아가 이승만 녀석을 완전히 내쫓아버리라고 제안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무지 그럴 기회가 생길 것 같지 않았다. 당분간은 이곳 가회동 언덕집 창고 안에 숨어지내면서 모종의 행동을 벌일 계획이다. 우선은 90년 쯤 후에 도래할 서울아트시네마와 독립영화, 예술영화에 대한 뉴라이트 분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약탈행위에 대한 예견과 비판을 담아 비석을 하나 세워둘 참이다. 이 글은 그 비석에 새겨 넣어질 글이며, 그런 취지하에 오직 진실만을, 객관적 사실만을 담아 작성되었다.
1924년 3월 6일, 경성 가회동에서 A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