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와 구원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와 구원

한 당나귀가 있다. 이름은 발타자르. 당나귀가 뭐라고 불려지든, 그것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것의 이름이 발타자르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영화의 내러티브적인 흐름이 이해하기 쉬운 편은 아니다. 사건들 간의 틈들이 잘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지고 생략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감정도 따라갈 수 없다. 지극히 건조한 영상 위에서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해 관객과 철저한 게임을 벌이다가, 다시 당나귀의 시선으로 돌아가면서 어떤 정서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캐릭터 자체에 감정이입을 가함으로서 만들어지는 감정이 아닌 다른 어떤 감정이 있다. 그 표면 위에 기독교적 구원의 메시지가 음울하게 새겨진다.

브레송 영화 중 내러티브가 강한 영화라고 할 수 있으면서도,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스토리텔링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 영화이다. 손과 발, 얼굴 클로즈업이 도드라진다. 행위들과 연출된 것이라고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 당나귀의 모습들 자체, 인물들과 당나귀 발타자르의 무표정들을 잡아내는 것으로 다큐멘터리적인 느낌도 든다. 브레송은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들」에서 그의 영화관에 대해 명확하게 서술한 바 있다. 정교한 스토리텔링이나 아리스토텔레스적 내러티브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영화'(시네마토그래프)만의 무엇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표정이 없고, 지극히 제한적인 행위만을 구현한다. 이때 인물들의 손이나 발걸음은 중요하게 부각되어 극단적 클로즈업으로 재현되는데, 브레송은 이런 식의 연출만이 행위 그 자체로 드러낼 수 있는 반재현성의 시네마토그래프만의 재현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배우는 배우이어선 안되며, 모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이런 의식의 소산인 것이다.

발타자르는 흡사 예수처럼 느껴진다. 어리석고 욕망으로 가득찬 인간들을 위해 대신 채찍을 맞고, 평생을 고통받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마지막 씬은 가히 최고의 장면이라고 할만하다. 그간 발타자르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그 악독맞은 젊은 남자 패거리에 의해 몰래 훔쳐진 발타자르. 어느 산, 들판 위에 버려진 발타자르가 무수한 양떼에 둘러쌓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은 정서를 자아낸다. 발타자르의 주위에 인간 대신, 양들이 모여든다. 양들은 소리 없이 진혼곡을 부른다.

발타자르의 생애를 둘러싼 인간들은 저마다 자신의 욕망, 질투, 시기, 증오라는 감정들에 갇혀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택하지 못했다. 그리고 발타자르는 그들을 대신해 죽음을 맞이했다. 발타자르는 구원받은 것일까? 이 영화만이 갖고 있는 그 깊은 잔상 굉장히 오래 남는다. 브레송의 위대함에 대해 찬사를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직 그것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가능하게 한 거지? 라는 질문이 떠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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