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본 <해운대>의 B급영화적 순간

<해운대>를 두번째 보았다. 이 스텍타클한 대중영화를 처음봤을 때 나는 별 다른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며칠 전 이 영화를 별도리없이 두번째 봐야했을때는 그보다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그 나름의 행운이라고 느껴진다. 차라리 두번째 감상에 있어서는 이 영화가 다른 영화들보다 나은 점이 있었다. 우선 이 영화의 두번째 관람에서 나는 감독의 시선을 보다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는데, 어쩐지 이 영화에서 우리가 그동안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지 않았는가, 라고 묻고 싶어졌다. 첫번째는 감독 자신도 의도하지 않은 것으로 느껴지는 아메리카 b영화적 감성이 그것이고, 두번째는 그 기묘한 비관이 그것이다. 감히 재단컨데 이런 의미망이 생성된 것은 아마도 모두 우연일 것이다.
우선 아메리카 b영화의 미학적 코드를 읽을 수 있는 것. 카메라는 기묘하게도 인물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슬랩스틱한 남성이 우왕좌왕하거나 주사를 부릴 때(설경구), 카메라는 기이할 정도로 인물 단독샷을 하이키로 잡고 휘청거린다. 보통 영화라면 그를 향한 객관적 시선들을 함께 실었을 것인데 이 영화의 카메라는 스스로의 시선으로 이 철없는 남성을 향해있다. 이것은 거의 ‘자조’에 가깝지 않은가? 게다가 저렇게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진상’들은 또 어떤가. 설경구가 야구장에서 그렇게 굳이 진상이 될 정도로 행패를 부리는 건 좀 과도하다 싶을 정도인데, 그 과도한 지점이 거의 일관되게 유지되어서 나중에는 그 과도한 남성 군상이 쓸쓸하고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요컨대 윤제균 감독이 그 남성 군상의 우스꽝스러움을 ‘애상’적인 차원으로 밀어붙이는 지점이 되지 않나 싶다. 이것은 설경구 뿐만이 아니라 죽은 이민기나 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셋 모두 제각각의 슬랩스틱한 면모를 드러내는데, 이민기에게는 ‘죽음’으로, 김**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끝맺음되는 저 비극. 왜 굳이 저 슬랩스틱한 남자들에게만 이렇게 비극을 안겨주는가? 여기서는 설경구를 죽이지 않은 것이 오직 상업적 고려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전봇대에 매달려있다가 하지원의 손을 놓치는 순간 죽은 것이 아닌가? 그리고 결국 ‘작은아버지’가 ‘대신’ 죽은 것이 아닌가?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해운대가 완전히 파편화된 상태는 이 영화의 b영화적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든다. 뭇 스펙타클 영화들에서 아름답게만 보여지던 평지풍파가 된 도시의 전경샷. 그런데 <해운대>에서는 이 스펙타클이 전혀 ‘아름답게’ 보여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초토화, 파괴, 상실, 전멸, 절망의 상태. 그러니까 여기에서 재앙이 갑작스레 멎어버린 후의 <투모로우>의 마지막 시퀀스나 외계인들이 물러나게 된 <아마겟돈>에서의 대통령의 희망찬 연설과 시민들의 재기의 발걸음들 같은 어떤 ‘재건’의 신화가 상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우리는, 절망의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것처럼 슬랩스틱했고, 재앙 후에는 절망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절망 가득찬 스펙타클에서 우리는 헐리우드의 여느 재난영화들보다는 아벨 페라라의 좀비 영화나 <28일 후> 같은 ‘재앙’의 영화들에서 본 스펙타클을 떠올리게 된다. 이 영화들에서 우리가 ‘재건’을 다짐하거나 도덕적 반성을 상기하게 되지는 않지 않은가.
또 다른 장면이 있다. 박중훈, 엄정화 부부가 결국 아이를 구해내고 빌딩의 옥상 위로 올라갔을 때. 소녀만이 헬리콥터에 실려 구출에 성공하고, 옥상에는 두 부부와 같은 성인들만이 남겨진다. 소녀가 하늘 위로 날아갈 때 박중훈이 울부짖으며 소리치는 신파조의 외침은 너무도 기이해서 웃음마저 나게 하는데, 그게 그저 피식, 하고 그만인 것과는 다른 외피를 두르고 있어서 주목하게 된다. “내가 네 아빠야! 내가 네 아빠다!!” 마지막에 박중훈은 왜 그토록 절박하게 외쳐야 했을까? 자신의 유일한 핏줄을 이 땅에 살려 보내는 것에서 혈연의 생존이라는 마지막 과제를 완수해야만 하는 책무를 느꼈던 걸까? 이 장면에서 나는 두 가지 장면을 떠올리게 됐다. 하나는 <스타워즈>에서 다스베이더의 마지막 절규. “I am your father!”,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아벨 페라라의 좀비 영화(영화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수입된 비디오의 제목은 <바디스내쳐>일 듯.)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딸만을 헬리콥터에 실려 올려 보내고 결국 아버지 자신만 남겨져서 땅으로 추락하는 그 장면. ***분명 윤제균은 <바디스내쳐>를 확실히 인지하고 인용했거나, 인상 깊게 보았으리라 생각된다. 이 b영화는 비디오로만 출시되기 일쑤인 b영화임이도 불구하고, 한국 비디오시장에서는 꽤나 인기를 끌었던 영화이다.

안타깝게 자식을 응시하면서도 동시에 뚫어지게 자신에게 ‘곧’ 의심의 여지없이 당도할 죽음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눈. 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이 아닌가. 그러니까 박중훈은 여기에서 어떤 실재를 목도한 것이다. 스펙타클을 뛰어넘는 죽음. 그리고 두번째로 밀어닥치는 쓰나미가 결국 이 빌딩 옥상을 뒤덮기 직전에 엄정화와 박중훈이 서로의 어깨를 보듬고 있을 때, 나는 엄정화가 “지옥에서 만나요, 내 사랑”이라고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치 영화 <박쥐>에서 김옥빈이 송강호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 그 대사가 말이다. 이 둘은 절묘한 반복이 아닌가. 한쪽은 불덩이 같이 다가오는 태양의 빛물결 앞에서, 다른 한쪽은 거대하게 다가와 우리 삶을 휩쓸어 가버리는 저 파도 앞에서. 그리고 주체로서의 ‘나-박중훈’에게 일어난 어떤 분열. 눈과 응시의 분열이 감지된다. 눈은 이제 주체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목도하고 있고, 응시는 살아남을 당신들을 향해있다. 이 영화의 얼룩처럼 느껴지는 이 장면에서 거의 유일하게, 카메라의 코기토가 드러난다. 그러니까 스크린 앞에서 감독 또는 카메라의 의식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이민기도 죽고, 박중훈도 죽게 되는데, 나는 이 ‘선택’이 확실히 ‘이유’있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은 이민기와 박중훈을 죽이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고, 설경구 정도는 살려내야 개봉시킬만한 상업영화의 양식은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감독의 페르소나가 반영된 네 캐릭터(설경구, 박중훈, 이민기, 김**) 중 둘만이 오직 살아남을 근거를 갖는다. 유독 슬랩스틱으로 일관한 설경구와 김**만이 말이다. 둘은 본래부터 페르소나의 왜상적 지위를 담당했으므로, 그리고 죽음충동 앞에서 끊임없이 이성과 무관한 상태로 일관했으므로, 실제로는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다. 설경구의 경우 이미 몇 년 전의 사고에서의 사건, 전봇대를 놓쳤을 때의 마지막 절규(“잘 살아야 한데이~~”) 때문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김**는 거의 죽음을 유희하는 수준에 도달한 인물이다. 그가 다리 위에서 비틀거리며 서있을 때 땅 아래로 떨어지는 콘테이너 박스들을 춤을 추듯이 피하는 장면을 보라. 이 슬랩스틱 영화의 묘미다. 반면 이민기나 박중훈 같은 진지한 인물들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살신성인의 이민기는 이미 ‘살신성인’이라는 임무 자체를 운명으로 지니고 있던 인물이며, 예지자이고자 했으나 결국 ‘관료주의’ 앞에서 좌절한 ‘전문가’ 박중훈은 이 우스꽝스러운 체제 앞에서의 실패(=죽음)을 운명으로 담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시 윤제균의 인터뷰 대목으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더 많이 집어넣”고 싶었다며, “이제부터는 영화를 좀 더 영화의 예술적인 측면에서 만들어겠”다는 포부를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스펙타클 재난영화, 기획력으로 성공한 대박 상업영화로만 보아왔던 <해운대>를, 윤제균의 자기반영적 영화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바로 그럴 때, 이 영화의 내면들을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틈새들이 생긴다. 윤제균이라는 장르영화 감독을 지독히도 싫어하던 나는, 그의 지난 영화 <1번가의 기적>이라는, 사회 소외층에 대한 시혜감으로 가득한 ‘드라마’영화를 통해 그 증오를 거두었었는데, <해운대>에서는 비로소 두 번 감상하는 것을 통해, 어떤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록 그가 작가적인 자질이나 예술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진 못하더라도, 그가 코미디의 장르성을 끈질기게 파고드는 과정에 의해서 결국, b영화적 미학성이 갖춰지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영화사에서 이런 ‘우연한’ 성취를 이뤄낸 감독들을 만날 수 있다. 그가 나중에 언젠가 그런 성취를 이뤄내길 바란다. (그가 시장의 승리자이기에 그만큼 ‘영화예술’의 열패감들을 양산하는 주체가 되고있다는 사실과는 아주 별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