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 윤리에 대한 메모

윤리란 <윤리>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왔지만, 그것만큼 근원적인 주제는 없다. 그러나 아주 쉽게 '윤리'는 거부당해왔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직 '도덕'으로서만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덕과 윤리를 동급이거나 거의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얼마전에 가카께서 말씀하시길 "국민들이 도덕적으로 재무장해야한다"고 했는데, 이처럼 솔직한 말이 어디있겠는가. 나는 그 말을 냉철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만이 진정한 유물론자라고 생각한다.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굉장히 펄쩍뛰며 그의 말에 반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계속 '도덕적으로 재무장'하며 자신들의 국민윤리를 다듬고, 자유주의자로서의 온건성을 옹호하고 있다. 요컨대 그들이 가카의 말씀에 통분하면서도 사실은 "진짜 도덕 재무장"은 젊은이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다! 라고 프로파간다하고있지 않았던가. 이야말로 지배계급 수장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수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점이 가카의 "국민 도덕 재무장론"이 가히 희극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징후로 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선거시기 자유주의자들이 가카의 말씀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런 극우주의적 '책동'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 미국에서 메카시즘적 광풍이 불때 보수적 기독교 분파 수장들의 도덕재무장운동(MRA)은 그런 반동적 흐름을 캠페인화시킨 것이었다. 어쩌면 기독교 장로님이신 가카도 그것에서 힌트를 얻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어쨌든, 최근의 준동에 대해 시큰둥했던 이유는, 그것이 아주 정확히 반대의 효과를 발휘할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꼭 긍정적이진 않았고, 자유주의자들이 아주 적극적이었던데 비해 좌파들은 대단히 무력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대체 거기서 무엇을 말하겠는가. 투표하지맙시다, 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말이다. 거기에서 좌파정치의 위기가 노출되는 것 같다. 어떻게 삽시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 아니 아예 할말이 없는 상태. 즉, 완전한 위기.
그러나 우리는 자유주의자들과 가카같은 독재자모드 정치엘리트의 '게임'에 무관심해질 필요가 있다. 유물론적 논지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인류는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점점 '동물'로 변모해왔다. 요컨대, '퇴행'해왔다. 역사란 이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주 먼 과거에는 그것에 별 차이가 없었다. 돌도끼를 들어 짐승을 잡아먹고 꼬챙이로 물고기 잡아먹던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라는 과정이 흘러갈수록 돌도끼는 핵폭탄으로 변하고 스텔스 폭격기로 변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인간의 '발달'은 후퇴해온 것이며, 지금은 엄청난 간극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의 모든 비극은 이 간극에서 생긴다.
결국 모든 사유는 최종 시점에 윤리에게로 도착하게 되어있다. 중요한 건 도덕이 아니라 자발성의 문제인 것이다. 일종의 윤리나 도덕은 행동 강령인데, 그러니까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가"라는 문제인데, 그 행동강령에 어떤 수행이 우리로부터 오느냐. 외부로부터 오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그 수행이 '외부'로부터 오게 되면 도덕이고, 내면적 자발성으로부터 온다면 '윤리'가 아니겠는가. 윤리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받아들인" '당연한, 어떤 기치, 생의 미션'같은 것이다. 스스로 받아들임. 그래, '자발성'의 문제! 그것이 바로 모든 사유가 결국 '윤리학'으로 사실은 귀결되는 것의 이유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문제. 인간은 바로 사유하는 동물이고 행동하는 동물인데 바로 행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자발성에 대해 생각해보노라면, 그 무엇보다 이데올로기론이 떠오르고, 다시 무의식과 정신분석학이 떠오른다. 나의 의식/무의식은 자발적인 것에서 기원하는가, 아니면 그 무엇에서 기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정신분석의 기원이 아니었을까. 나는 단 한번도 이 모든 것이 자발적인 것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해본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내 모든 것이 자발적인 것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착각'해왔다. 이 기이한 형용모순에서 내면의 '간극'이 노정된다. 이게 우리가 지닌 그 모든 권태, 지리멸렬, 자기혐오, 증오, 후회들의 근원이 된다. 나는 이 간극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대면하고 싶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도 어렵다. 삶의 장애물들이 그렇게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결국 문제는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데, 그걸 어떻게 극복해내는가가 지금 내 삶의 쟁점이 되고말았다. 이런 고민을 하다가 사람들은 도닦으로 산에도 가고, 아니면 파국적으로 자기 몸을 밀어붙이고, 혹은 신부나 목사가 되고, 혹은…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