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중심성’이라는 텅 빈 기표를 재정의하기

노동정치를 둘러싼 뭇사람들의 언어는 참 불친절하다. 그것이 정작 노동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일까? 얼마 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기존의 우려를 벗어나 토론 수준으로 다뤄진 민주노총 정치방침안 4항 “농민, 빈민 등 진보 민중세력 및 진보정당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고 노동중심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와, 5항 “여러 진보정당이 각자도생하는 방식이 아니라 진보정치 세력이 대단결 하는 노동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통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 역시 마찬가지다. 눈에 띄는 말은 ‘노동중심성’인데, 노조 없는 일터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들로서는 대체 무슨 뜻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냥 “노동자들이 중심인 당”이나 “노동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는 당”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추구해야 하는 내용과 구체적 실천은 사라지고 ‘조직론’이라는 앙상한 대안만 남는 것이다.
이런 편향이 어제오늘 문제는 아니다. 10년 전부터 노동운동 안팎의 원로들과 주요 인사들은 버릇처럼 “노동중심성”을 말해 왔다. 그런데 대체 그 노동중심성이 뭐란 말인가? 어떤 이들은 노동조합 중심성, 또 어떤 이들은 노동자 중심성이라고 해석한다.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2030세대가 겪는 노동 현실을 반영하도록 정치적 감각을 교체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령 같은 정의당 내에서도 ‘노동조합 중심성’의 의미로 노동중심성을 말하는 노조 출신 논자들이 있는가 하면, “민주노총과 거리를 두고” 조직 없는 노동자들을 대리하는 것을 새 시대에 맞는 노동중심성이라고 간주하는 그룹도 있다. 혹자는 “노조 상근간부층 중심성”이라고 혹독하게 평가하기도 한다. 가히 ‘노동중심성’은 텅 빈 기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로 거슬러 가 보자. 2011년 민주노총은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방향’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이 보고서는 당시 민주노동당의 노동중심성 강화를 위해 “대대적인 당원 가입”을 펼치고 “기금 100억원을 조성하자”고 주장했다. 진보정당 당원의 과반을 단순히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채우면 노동중심성이 강화될까? 진짜 문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이념과 현장에서의 실천이 아니었을까? 이후로도 이런 공백은 채워지지 않았다. 공허한 동원론은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을 단순한 득표의 대상이자 대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엘리트 정치만 남길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착취를 바탕으로 이윤을 남기는 자본은 노동자들의 상호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유지된다. 그것은 TV에서 쌍심지를 켜고 싸우는 유시민이나 이준석 같은 부류가 공유하는 ‘시장에서의 등가물 교환’이란 미신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일부를 보상하지 않음으로써 확대된다. 아마도 20여년 전 ‘노동중심성’이라는 테제가 제기된 것은 단순히 노동인구가 많거나, 노동자들이 원래부터 진보적이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착취를 가능케 하는 숨겨진 장소를 알아차리고, 그것에 맞서 자신의 정치를 펼치는 사람들로부터 체제 변혁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망각한 지 오래다.
더구나 단순히 ‘노동중심성’을 충분한 설명 없이 공염불처럼 반복하는 것은 젠더 지배와 기후위기, 인종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 억압 등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위기에 맞서 응집해야 하는 주체들을 호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관성의 반복은 노조 안팎의 사회운동 주체들로 하여금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오랜 프로젝트가 진정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을 꾀하는 것인지 의심케 할 것이다.
언론이나 전문가, 심지어 활동가들 사이에서 노동 문제에 대한 발화는 고정된 틀에 박혀있다. 한편에서는 악독한 자본가의 탄압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서사, 다른 한편에선 노조의 집단이기주의가 낳은 불협화음 등 서사가 반복된다. 새로운 듯하지만 반복되는 서사도 있다. 가령 정의당의 조성주 같은 이들은 ‘조직노동’과 ‘미조직노동’을 분할해 둘의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것처럼 말하고, 자신을 짐짓 후자에 위치시키는 발언을 반복한다. 이들은 사실관계 오류와 왜곡까지 감수한다. 예컨대 “노조 조합원 대다수가 소득 상위 20%에 속한다”고 근거 없이 주장한다. 민주노총 조합원 과반수는 평균임금 수준을 받는다.
사실 우리의 구체적 노동은 고정된 서사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숨겨진 서사들을 갖고 있다. 우리의 노동은 종종 건강이나 외모, 장애, 정신질환, 돌봄, 늙음 등 많은 것들과 연결돼 독특한 착취 형태를 구성한다. 지난달 출간한 <일할 자격>(도서출판 갈라파고스)의 저자 희정이 말하듯, “노동은 노동 그 자체로만 말해질 수 없”다. 우리가 노동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우리가 어떤 노동자인지를 말해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근면성실, 미혼모, 여성의 정신질환, 노인 노동, 과체중, 군미필 등의 키워드에 얽힌 노동을 고찰한다. 통상적인 노동 서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우리의 노동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아무도 물으려 하지 않았던 “나쁜 노동자들”의 “일할 자격”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 인생의 여러 복잡하고도 사소하며 지긋지긋한 문제들 어느 하나 노동 문제가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어느 것 하나 기존의 노동 서사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십수 년 사이 전통적 민중운동의 틀은 희미해지고, 노동운동과 노조 바깥 사회운동 간 간극은 커졌다. 노조 바깥에서 노동운동이 하나의 부문운동으로 인식되면서 다른 문제들과의 연결성이 사라진 것이다. ‘노동’이 다시 사회운동의 장소가 되려면, 그것을 둘러싼 투박한 정의가 생생한 언어로 재정의돼야 한다. 일터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노조나 지역공동체가 될 수도 있고, 일시적으로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될 수도 있다. 최근 민주노총은 ‘초기업(산별)교섭’의 활성화를 위한 제도 마련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런 제도개선의 밑바탕에는 실천과 그것을 공유할 공간이 필요하다. 진보정당이나 노조가 대리정치의 환상에 갇히지 않고, 노동하는 대중들의 싸움 가까이에 다가가 가시화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바로 그때 노조간부들만의 것으로 여겨지던 ‘노동정치’의 단초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매일노동뉴스 2023년 5월 10일자 칼럼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4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