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정의

꼰대의 정의

우석훈씨의 “청년유니온, 우리가 후원자가 됩시다”라는 글을 읽고 몇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 글에서 그는 “꼰대의 정의”를 논하며 청년유니온의 후원회원이 되자고 제 꼰대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20대로서, 우리 세대의 자립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던 나는, 그의 지속적인 개입에 대해 일정한 불만을 갖고 있다. 그 불편하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지점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의식적으로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 글은 ‘실패한 담론’의 생명력을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연장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곁다리로 붙인 여러 논거들은 큰 설득력을 갖지 못했고, “우리도 일본처럼”이라는 식으로 환기되는 ‘선진화’라는 단어도 대단히 불편했다. 모든 언어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쓰여지는 맥락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발화되어야하는데, 확실히 ‘꼰대들’(그 스스로 자신을 꼰대라 지칭하니 편의상 그리 부르도록 하겠다.)은, 그 중에서도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착각하는 ‘꼰대들’은, ‘보수주의자들조차’ 용인할 논리구조를 획득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아주 종종 그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언어가 그렇게 도구적으로 차용되었을때 윤리적으로 바로 쓰여질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예컨대 ‘사소한 복지조차’라는 식으로 통용되는 ‘진화론’적 논거들은 사회의 진보를 단계론적이고 진화주의적으로 사고하는 철학적인 한계를 노정한다. 이것은 꼰대들의 정치적 한계이기도 하다. 나는 ‘선진화’라는 테제가 정녕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부터 진정한 사회적 변혁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선진화’ 테제 아래 얼마나 많은 권리들이 부당하게 억압되어져왔는가. 혹은, “일단 정치적이고 절차적인 민주화를 이루고”라는 단계적 사고 아래 얼마나 많은 보편적/경제적 권리들이 부당하게 미루어져왔는가. 이런 방식으로 몽매하게 뭉게버리고서는 그 어떤 걸 말하든 돌아와 심장에 박히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을 표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계속 그런 방식으로 말하는 방법 밖에 모른다면, 그들 ‘꼰대들’에게 있어서 ‘보편적 권리의 쟁취’는 “영원히 유예될 것”이다.

한편 자칭 ‘꼰대’라는 우석훈씨의 저 담대한 ‘난 채’는 그 선한 마음쓰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20대에게 “우리들은 영원히 너희들의 ‘꼰대’가 되겠노라”고, 상냥하게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배알이 꼴린 자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요컨대 어쩌면 20대가 거부해야할 것은 바로 이런 상냥한 으름장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보다 더 단도직입적으로 싸X지 없는 놈이 되는 것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그런 호의일랑 필요없으니 그냥 ‘꼰대들’의 그 오래된 트라우마와 멜랑콜리한 우울증이나 잘 상대하시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대체 ‘주체’가 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어떤 면에서 그는 가장 계몽주의적인 386세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정말 20대의 문제가 이런 식의 ‘계몽의 아버지’가 없어서 문제인걸까? 이렇게 잘 지도해주고 지침을 내려주고 후원을 해줄 아버지들이 없어서? 도리어 오늘날 20대에겐 이런 계몽의 아버지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하나의 아버지를 넘어서면 또 다른 아버지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20대는 자신도 모르게 “너무 빨리 늙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80년대의 20대가 안다고 믿었던 것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정치적 급진화되었었다면, 오늘날 20대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한다. “나도 알아. 그런데 뭐?”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살면 영원한 경쟁의 사슬 속에서 살아갈 것임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살아봐야 항상 쳇바퀴 안에서 맴돌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계속 살아봐야 나의 부모님의 계급을 그대로 물려받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단지 배제와 포섭의 논리가 이미 내면 깊숙히 파고들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면에 20대의 파괴적인 욕망, 혹은 자기 혐오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나 자신에게도 궁금하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구원의 영웅이 되길 희망하지만, 동시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를 염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마조히스트이다. 한편 ‘꼰대들’은 아버지-의-이름을 쟁취하기만을 욕망하는 기이함을 보이고 있다. 자신들 모두가 제각각 역사의 짐을 떠안은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자유주의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다른 의미에서의 마조히스트이다. 나는 이 자기학대의 유산이 의심스럽다. 요컨대 ‘꼰대의 정의’라는 것도 모종의 자기-학대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얼마 전 나는 기형도의 시집을 다시 들춰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죽음을 경과하던 당시의 환호가 386세대의 멜랑콜리한 자기학대를 잘 드러냈던 결과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 오늘날 20대는 아무것도 멜랑콜리하게 회상하지 않고 그저 냉소적이며 현실에 대해 항상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는데, ‘자기학대’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물론 아주 단순하게 20대의 가난 문제로 돌아온다면, 그것은 역시 가장 큰 문제인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오늘 저녁을 종로3가역 5번출구 앞 편의점에서 파는 1000원짜리 ‘콩&후르츠 뉴트리션바’로 채워야 했다. (지금도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 물질적 빈곤이 진정한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굴레에 빠지게 된 시발적이며 표면적인 ‘원인’이 될지언정 이 함정을 벗어나기 위한 ‘행동’을 감행하는 것에 있어서 딛어야할 지점인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 모든 모순이 ‘운동’과 ‘연대’로서 극복될 수 있다면,(오직것만이 유일무이한 해결책이기도 하다.) 도리어 20대의 진정한 문제는 자립하지 못하는 태도, 용기의 표면적 상실, 혹은 냉소주의 그 자체가 아닐까. 지난 5월 열렸던 독립영화인들의 영화제 <인디포럼>이 꺼낸 화두는 ‘자립’과 ‘용기’였다. 오늘날 독립영화계나 문화예술운동진영이 처한 진정한 문제를 국가지원의 단절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서 모든 것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 우리의 현실임을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물론 정부가 가하는 모종의 압박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 조건을 인정한 상태에서 과연 우리가 자립할 수 있는지는 의문시되었던 것이다. 본래 우리는 가난하게 투쟁할 수도 있었던 이들이 아니였냐면서 말이다. 이는 20대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만약 이런 맥락에서 ‘20대’라는 기표가 스스로 ‘대의’를 칭한다면, 20대는 스스로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 스스로 ‘말’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아무도 대신 말해주어서는 안되며, ‘대의’를 말하는 주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청년유니온 활동을 하는 20대가 직접 나서서 후원을 요청하는 것과 처음부터 계속 20대의 영원한 ‘꼰대’인 것처럼 행동하는 우석훈씨 같은 이가 ‘꼰대의 정의’ 운운하며 호의를 보이는 것은 확연한 맥락의 차이를 드러낸다. 우석훈씨는 끊임없이 ‘20대’를 작위적으로 호명하며 목적어로 차용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대의’ 자체를 ‘도덕론’ 아래로 부차화시키고 있다. 그는 자신의 말이 그러한 방식으로 발화되는 순간, ‘정치적 주체화’의 경로는 우스꽝스러운 수준으로 결락되기도 하다는 점을 알아채야 한다. 도리어 그는 매개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인지하고 ‘20대’의 독립이라는 담론의 장에서 익명의 숲으로 사라져야할 때를 맞이하고 있다.

어쨌든 사소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첨언하자면, 기성세대가 여전히도 20대에 대한 열렬한 관심을 버릴 수 없어 익명으로나마 혹은 아무 소리없이 조용히 후원금을 모으고 조직해내겠다면, 나는 절대 말릴 생각이 없다. 그런 조용한 호의에는 기성세대의 허세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첨가하자면, 부디 꼰대들은 청년유니온 인터넷카페에 가입인사 좀 올리지마시라! 어떻게 된 게 꼰대 가입자가 20대보다 더 많다.) 그러나 또 다시 괴이한 방식으로 담론 공간 위에서 전혀 정의롭지 않은 방식으로 ‘꼰대의 정의’를 운운하는 것은 반대한다. 그것은 불필요한 과잉 친절이거나, 혹은 일종의 ‘아버지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0대에게 ‘꼰대’는 필요하지 않다. 다만 나는 20대가 그/녀들 스스로 저 꼰대들을 부정하고 몸소 앞으로 직접 나아가길 바랄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꼰대’이신 우석훈씨의 (20대 담론장에서의 ) 퇴장을 요청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 20대는 눈에 뵈는 것도 없다는 듯이 좀 더 버르장머리없이 나아갈 필요가 있다. 행동은 본래 부박스럽고, 실천은 간극을 노정하는 것이니 그런 합리주의자스러운 두려움일랑 모두 떨쳐버리자. 우리는 더 이상 실용주의적이거나 합리적일 필요가 없다.

2010년 7월 한겨레hook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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