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장편소설 『노서아가비』

김탁환의 소설 <노서아가비>를 읽었다. 휴가 복귀하는 날 단방에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길지 않고 쉽게 읽히는 소설이다. 흥미진진하기도 하며, 김탁환은 스스로를 '소설노동자'라고 칭한다는데, 하루에 반드시 원고지 40매를 쓰지 않으면 마음 속에 불편함이 있다고 한다. 얼핏얼핏 소문만 들었던 그의 소설을 실제로 읽으니 그 '노동'의 생산물들을 접하고나니, 그가 말하는 '스토리텔링론'의 요체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스토리텔링론' 자체에 적극 공감이 가고, 그것을 그저 쓰는 것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감독의 경우에는, 영화를 써야지! 운동가가 운동을 해야하는 '운동가'인 것처럼!
<노서아가비>는 구한말 조선 최초, 고종의 바리스타의 이야기 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역사적 사실과는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배제한 채로 구성되었다. 그녀-따냐가 민족으로부터 '버려진' 여자이기 때문에 그녀의 캐릭터도 조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만국적 통용 이념으로서의 박애주의가 이 '쿨'한 소설의 밑바탕에 어느 정도의 정서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 아무리 '사기꾼'이야기라고 주장한다한들, 이 소설은 사실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의미에서 '사기치지 않은' 여성 따냐의 '인간애', '고독'에 대한 소설이다. 그녀가 마지막에 '고종'과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 것으로서 고독했던 왕 고종을 소환시키는 힘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죽은 김역관이야말로 사랑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불행하게 죽은 것이며, 그가 평가절하했던 따냐의 행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확실히 '사랑의 실천'이었다. 왜 그녀가 믿어야 하는가. 믿음을 가장하고 속아주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에 대한 배반이다. 따냐는 결국 사랑했던 남자를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실제로는 '죽음'이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는 길로 안내한 게 아닐까.
'노서아 가비'는 러시안 커피의 한자 번역음이다. 러시안 커피의 뜨겁고, 독한 맛이 삶과 역사의 고독, 쓰라림으로 대비되고 있다. 이들이 러시안 커피를 따라 삶을 살아간 것도, 결국 운명에 대한 대면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그 독한 맛을 피하지 않는 것, 중독 자체를 있는 그대로 즐기며 독한 삶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노서아 가비'가 그렇게 형상화되고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가고 있다. 한편, 이 소설이 김탁환이 열망하는 것처럼 '발자크'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없는 건, 허구적인 것들을 허구적인 것 안에만 머물러있게 만드는 묘사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역사의 소재꺼리'들을 징검다리 삼아 허구적인 것을 소환시킴으로써 '실재'를 대면하는 게 아니라, 그저 허구적인 것 안에만 머물러있게 만드는 힘. 그게 플롯 전체를 휘감는다. 그러니까 사실은, 스타일이 갖는 힘이 커피처럼 독하진 않고, 그저 데면데면하며 가볍고 톡톡 튀는 것이, 러시안 커피라기보다는 작가가 그토록 좋아한다는 카페라테 같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카페라테는 이 소설 속에 그려진 허구적 삶들과 캐릭터들의 운명과는 별로 들어맞지 않는 것 아닌가. 작가의 말처럼 커피가 "계속 이어나가야할" 우리들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도리어 삶처럼 우리를 중독시키는 카페인의 지독한 중독 상태에 대해 생각해야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들은 아무것도 중독시키지 못한다. 심지어 이야기를 절정에 치닫게 만드는 재료는 불행히도 커피가 아니라 아편이었다. 왠지 이런 식의 소재주의는 발자크적인 것과는 정반대인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