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유머·삶,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12:08 East Of Bucharest, A Fost Sau N-A Fost?
루마니아, 2006,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
원제는 "12시8분 부카레스트의 동쪽"인데, 이는 이 영화의 중심 무대가 되는 부카레스트라는 작은 도시의 지역 TV방송국 토크쇼에 출연하게 된 술주정뱅이 역사학자 마네스쿠(사진에서 오른쪽)가 16년전, 혁명이 일어났던 시의회 광장 앞에 있었는가라는 화두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2006년 칸 국제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수상작으로, 코르넬리우 포롬보이우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방송국의 사장이자 토크쇼 진행자인 지데레스쿠(사진 가운데)는 루마니아 민주화 혁명 16주년이 되는 12월22일을 맞아 두 명의 지인을 초대한다. 마네스쿠와 혼자 사는 노인 에밀리오 피스코치(사진 왼쪽)다. 영화는 둘의 건조하고 조금은 어리석지만 순박한 일상을 계속 보여준다. 에밀리오는 산타클로스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낡은 산타복을 입고 수염을 사러 크리스마스 상점에 가서 수염을 사오는 순박하고도 괴팍한 노인네다. 그리고 마네스쿠는 역사 교사지만, 술주정뱅이어서 집에서는 마누라에게 구박받고, 밖에서는 지난 밤의 실수들을 사과하고 다니는데다 빚은 또 엄청 많아서 월급 받은 그 날 빚으로 다 갚아내야 하는 형편의 '진상' 중년 남성이다.
결국 셋은 시청자와의 전화연결도 되는 생방송 토크쇼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마네스쿠의 조금 믿기 어려운 무용담으로 시작되는데, 곧바로 시청자들의 반박 전화가 이어진다. 토크쇼 진행자와 마네스쿠, 마네스쿠와 몇몇 시청자들간의 말싸움이 시작된다. 마네스쿠와 그의 술주정뱅이 친구들이 1989년 12월22일 12시8분에 시청 광장에 있었는가, 아닌가 때문이다. 이 과정 속에서 동유럽이나 스칸디나비아권의 코미디 영화들에서 목격되는 특유의 유머감각들이 발휘된다. 그들은 진지하고 심지어 열을 내며 싸우거나 울상인데,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웃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코미디!
영화는 기억이란 것은 유동적인데다 개별적이어서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해 밝힌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대신 휴머니즘과 유머, 그리고 아름다운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 전야의 밤을 즐기면 되지 않느냐고 이야기한다. 혁명이라는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진지한 사건에 대해 어떤 딱딱한 자세도 거부한 채 되려 딱딱한 카메라로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아이러니가 이 영화의 묘미다. 고정된 롱테이크로 계속되어있고, 인물들의 동선, 대사가 오갈때에도 카메라는 안정적으로 고정되어있다. 이 역시 동유럽 영화들에서 엿볼 수 있는 면모들이다. 얼마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유, 더 리빙>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단 한번 카메라가 심하게 핸드헬드, 패닝을 거듭하는데 바로 토크쇼 장면에서다. 이 장면은 이 토크쇼를 중계하는 카메라의 시점으로 구성되어있다. 카메라맨의 시점이기도 한데, 영화를 보면서 카메라의 시점을 체험한다는 것은 묘한 충돌지점을 낳게 된다. 시청자라는 자기인식을 갖게 되는 동시에, 흔들거리는 카메라 속에서 색다른 미학적 유머도 가미되는 것이다. 그때까지 지난하게 픽스된 롱테이크 카메라로 고집되던 영화가 토크쇼를 중계하는 순간만큼은 제멋대로이고, 포커스도 어긋나는데다 프레임도 불안정하다. 미니멀리즘한 이야기 속에서 카메라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가미된다.
이 영화가 가볍게 보여주는 것처럼 때론 역사 앞에 진지하지 않을 필요도 있다. 이 영화가 다루는 역사적 소재가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 국가였던 루마니아 공산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태도가 보다 더 부담감 없이 다가오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 과거'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고 오늘과 현재에 주목해 삶을 긍정해나가는 시선이 오히려 자기 역사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나 무게잡고 이야기하는 태도의 경향에 대한 반대급부적 실천이 될 수도 있겠다.
언젠간 다시 미래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며 유머러스하고 즐겁게 기억을 이야기하는 공간도 오기를 염원한다. 그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 영화가 다루는 기억과 역사에 대한 오늘날의 인간의 문제는 '삶의 태도' 그 자체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