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오늘 오전 알바시간에 몰래 써서, A3 두 장으로 급히 프린트해, 고대 다니는 후배에게 저 대자보 옆에 소심하게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그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이, 경망스럽게도 오마이뉴스 헤드라인에 소개되었다. 아래 글에서 가장 핵심은 386세대 비판인데 기자가 그건 넣지 않았구나. 아무튼 미치겠다. 나 자신의 삶도 역겹고 구질구질해 힘겨운데, 이런 방식으로 뉴스를 타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임을 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사건화된 선언, 이 이슈이다.]

오늘 아침 지하철 가판대에서 우연히 경향신문 머릿기사를 보고 바로 구입했습니다. 물론 저는 김예슬씨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예슬씨가 감행한 용기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삶의 지표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압니다. 왠일인지 지하철 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출근시간이라 사람들이 빼곡 차있었는데 말이죠. 이제껏 고려대학교를 자퇴한 사람들, 자기 행로를 바꾼 사람들은 이따금 있었지만 그걸 사건화시키고 선언한 것은 예슬씨가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삶 앞에 지쳐서 헥헥대고있던 저는, 예슬씨로 인해 다시 용기를 얻었으며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슬씨 말대로 저 거대한 탑은 아직 끄떡 없습니다. 삶은 고되며 매섭지요. 그러나 이 두려운 이탈이 단순한 '회피'나 '도망'이 아니라는걸 알기에 저는 제 삶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대기업의 하청업체, 직업소개소, 자격증 따는 곳이 되어버린 대학이라면, 차라리 그 엄청난 돈을 갖다바치느니 문예아카데미나 훌륭한 강좌들에 다니며 스스로 공부하고 단련하는게 더 나을겁니다. 세상의 거센 풍파 속에서 진정한 스승들을 만나는게 더 현명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왜 이 엘리트주의적 망령 안에서 우리끼리 자족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경쟁의 수렁 안에 몰아넣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또 왜 그런 마조히즘적 단련을 통해 스스로 <체제의 새디스트>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까? 예슬씨의 선택과 '선언'은 고려대학교 안의 여러 학우들에게 두려운 선택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개인의 삶의 어떤 선택의 순간을 스스로 드러내어 '선언'하고 '사건화'시키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에는 팔레스타인인도, 노예도, 여성도, 유대인도, 로마인도 따로 없다고 말하며 율법을 거부하고, 예수의 부활하심을 선언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소심하게 응원을 보내고 말 것입니까, 아니면 모종의 실천을 감행하실 겁니까? 다 같이 자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모순덩어리 각본 앞에 계속 복종하실 겁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저는 그냥 묻고 싶은 것입니다. 이 질문을 회피하지말것을 요청하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그 질문을 회피한 자들은 386세대처럼 “힘 센 형님들”(김반장)이 보시기에 그리 밉지 않을 정도로 곱상하게 늙을 것이며, 회피하지 않는 자들은 새로운 세대의 삶을 살 것입니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이 대자보를 읽은 우리들의 의무이자, 예슬씨가 우리들에게 안겨준 과제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 이것은 저 자신에게도 던지는 질문이자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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