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광장, 정치공학과 스펙타클

광화문 서쪽 청운동에 사는 주민이다. 몇 년 전 차도를 광장으로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설레었었는지 모른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과 빌딩의 도시 서울에도 걸으면서 사색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공간이 생겨가고 있다는 작은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나는, 광화문광장의 키치적인 스펙타클을 보며 할 말을 잃고 절망하게 된다. 키치란 “속악한 것, 가짜 또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이비 등”을 뜻하는 미술 용어이나, 현대에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지금 광화문광장이 ‘키치’가 된 것은 ‘오늘’의 동시대적 가치나 ‘역사’의 촉각적 가치들과 절연된 채로, 서울시와 정권의 ‘키치적’ 전시행정과 절묘하게 조우했기 때문이리라.
차도가 광장으로 변화되었을지언정 그 광장이 정녕 우리 시민들에게 필요했던 그 광장인지는 모르겠다. 그곳에서 걷는 걸으면서 나는 어떤 암묵적 강요를 느낀다. 다분히 일정한 경로, 그리고 강박적으로 빼곡빼곡 조형물들을 채워가는 전시행정이 만든 ‘가짜 광장’의 모습은 가히 ‘평면적’이며, ‘일방향적’이다. 뿐만 아니라 광화문과 그 뒤의 북악산을 가리는 거대한 세종대왕상은 또 어찌 한가. 역사성을 되살리겠다는 취지는 좋으나, 그것이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통찰을 갖지 못하면서 속악함만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저 거대하기만 하며, 왕의 권위적인 표정은 남대문로에서부터 세종로를 따라 광화문과 북악산, 그리고 푸른 하늘까지 펼쳐져야할 시야를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다. 왕은 왜 문 밖으로 나왔는가? 마치 걷고 있는 산책자들을 위엄한 시선으로 내려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내가 알던, 백성을 사랑하고 창조적 문화를 갈망하던 그 왕이 아니다. 일방적이고 전시적인 행정으로 시대의 그늘을 가리려는 체제의 빅브라더상처럼 느껴질 뿐이다.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은 더 이상 ‘참여’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한복판에 널리 전시되어진 키치적이며 원색적인 조경을 멀찍이 서서 구경하는 역할만 강요받는 ‘대상’이 되고 만다. 이 얄팍한 미학의 공원 안에 사람들이 들어갈 때 그들은 공원의 주인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다보기에 좋으신" 피조물에 불과하게 된다. 방문자들은 저토록 괴상망측하게 전시된 꽃밭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대체 누구를 위한 꽃밭이란 말인가. 이곳에서는 누구도 주체가 될 수 없다. 글쎄, 이 1차원적 풍경을 향유할 수 있는 헬리콥터는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세계의 어느 유명 광장을 가더라도 이런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것이 ‘한국적’이라 한다면, 오늘날 시민을 그저 전시행정의 ‘대상’으로서만 취급하고, 민주주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이 ‘한국적’ 권위주의 체제를 상징화하는 차원에서만 그러할 것이다. 도무지 이 광장에는 그 어떤 역사도, 시대도, 그리고 위대하고 너그러웠으리라 여겨지던 저 왕조차도 위악한 것으로 변모해버린다.
누가 광장을 이리도 속악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가? 이 키치적 풍경의 전시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상징적인 재현이 아닐까. 광장 한복판에 모든 시야를 가릴 만큼 거대하게 세워진 세종대왕상은 우리시대의 새로운 ‘권위주의’체제의 ‘스펙타클’이 아닐까? 그리고 그 뒤에 광화문 앞까지 펼쳐진 드넓은 조경은 역사와의 소통이나 시민의 참여와는 동떨어진 채 돌아가는 지금 이 순간을 반영하는 풍경이 아닐까? 광화문광장의 ‘스펙타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엄혹한 파시즘의 전조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지난 시절 이 공간을 시민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우리는, 이제 ‘공간’뿐만 아니라 ‘풍경’마저도 우리가 스스로 지켜야만 하는 지경까지 왔다.
[엄마를 대신해 신문에 투고하기 위해 썼지만 보내지 않았다.]
메모
광화문 광장이 개방되었다. 별로 기대도 되지 않았고, 기대할 이유도 없었지만, 가볼 수 있는 상황이기에 가보았다. 생각보다 더 최악의 전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갇힌 듯이 꽃화분 주위에 몰려있었고, 닭장차들은 공원 가까이를 두르지 못해 안달이었으며, 중앙의 꽃판 양쪽에는 각각 3차선의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이 공원 안에 갇힌 사람들을 위협하는 형상이었다. 공원은 주체가 아닌 '대상'들인 방문자들을 원한다. 이 얄팍한 미학의 공원 안에 사람들이 들어갈 때 그들은 공원의 주인(주체)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다보기에 좋으신" 피조물에 불과하게 된다. 이미 죽었지만 자신의 죽음을 알지못하는 방문자들은 저토록 괴상망측하게 전시된 *키치적인 꽃밭의 '대상'이 되고만다. 대체 누구를 위한 꽃밭이란 말인가. 이곳에서는 누구도 주체가 될 수 없다. 헬리콥터와 멀리서 보시기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높으신분만이 이 공원의 주인인 것이다. 헬리콥터는 꽃들에게 자유를 허하라. 복구 중인 광화문도 곧 개방될테지만, 스펙타클은 더 이상, 전혀 재현될 수 없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도, 더 이상 스펙타클을 경험할 수 없었다. 남대문도 다르지 않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거대서사와 스펙타클의 붕괴 이후에 어거지로 복구한 가짜들의 복구물임을. 불타오르는 작년 2월의 그 모습이 우리가 목격한 마지막 스펙타클이었다. 그리고 용산 참사가 있었으며, 그 후로는 또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말없이 또 다른 파국을 기다리고 있다. 국회의사장 난투극 따위는 너무 보잘 것 없다. 더 거대한 파국적 스펙타클을 그들에게 선보여라.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